최근 문화예술계의 뜨거운 화두 중 하나는 바로 ‘관객’일 것이다. 이제 관객(觀客) – 구경하는 사람으로서 수동적인 역할에 머물기보다 수용자, 참여자, 사용자로서 문화예술 활동의 중심이 되어 다양한 역할을 부여받는 경험이 늘고 있다. 이러한 예술 흐름의 변화는 예술 공간에 대한 고민으로 연결되어, 단순히 미학적으로 완성된 작품을 일방적으로 감상하는 장소에서 관객이 직접 체험하고 수행하는 작업을 담아낼 수 있는 공간, 더 나아가서는 예술적 경험 자체가 일어날 수 있는 공간에 대한 요구로 이어지고 있다.
11월 15, 16일 이틀 동안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과 국립현대미술관이 공동주최한 ‘과학기술과 예술 그리고 창조적 문화예술 공간을 위한 <오픈토크>’는 이러한 맥락에서 의미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두 번째 날은 미래의 문화예술을 위한 창조적 공간에 대한 생각을 나누는 자리로, 영국 상상력연구소(Institute of Imagination, ioi)(관련기사 – 예술적 상상을 실험하는 하이브리드 공간)의 톰 도스트(Tom Doust)가 ‘4차 산업혁명, 스마트 시대에 문화예술 공간의 방향은?’이라는 제목으로 기조연설을 했다. ‘아이들이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은 폐쇄된 공간이 아닌 최대한 열린 공간’이라는 아동심리학 연구에 대한 내용부터 ‘단 한 번도 정리정돈 된 적 없이 늘 지저분했던 아인슈타인의 책상’에 대한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감을 통해 아이들이 자유롭게 상상하고 도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간다는 상상력연구소의 활동과 방향에 대해 좀 더 상세한 이야기를 들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상상력연구소는 예술과 교육, 과학과 디지털기술이 만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과 워크숍을 개발하고 ‘상상력 랩(Imagination Lab)’으로 운영하고 구현해 왔다. 이곳에서 ‘경험과 학습 디렉터’라는 다소 생소한 직함으로 일하고 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경험과 학습 디렉터’라는 직책의 핵심은 ‘경험’에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의 경험이 중심이 되는 독창적인 공간을 만들어 마음껏 상상력을 발휘해보는 경험들을 충분히 제공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현재 집중하고 있는 것은 새로운 도구(tool)와 주제를 활용해 재미를 느끼면서 동시에 여러 가지 문제들을 생각하게 하는 도전적인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이를 통해 사회적인 흐름을 반영하고자 한다. 최근 우리는 엄청난 기술 진보의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어느 때보다도 인간의 상상력과 창의력이 중요해지고 있고, 그러한 인간 본연의 능력들이 기계나 로봇과 달리 사람을 구분 지을 수 있게 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앞선 강연에서 프로그램의 주제를 선정한다고 들었다. 어떤 과정을 통해 주제를 선정하는가.
현재 사회가 워낙 빠른 속도로 변화해가기 때문에 프로그램 역시 참가자들의 요구에 맞게 민첩하게 바뀌어야 한다. 그래서 두 달에 한 번씩 주제를 바꾸어가면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먼저 일종의 ‘도발’로서, 구체적인 주제나 방향을 특정하기보다 보는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해달라는 ‘초청’임을 먼저 밝혀두고 싶다. 예컨대 ‘메트로폴리스(Metropolis)’라는 주제는 미래 도시의 모습은 어떨지 스스로 상상해보고 해석해달라는 제안이다. 큐레이팅의 관점에서는 외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고 주로 영감을 얻는데, 해석의 여지가 많은 개방적인 주제를 선정하여 사람마다 상상력을 최대한 끌어내 자신만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예를 들어 ‘리얼리티(reality)’에 대해 다루면서 우리가 생각하는 가상과 현실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있음직한 현실’을 과거에는 마술쇼 등에서 경험할 수 있었다. 미래에는 증강현실(Augmented Reality, AR)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고, 현실과 가상의 접점은 단적으로 가상현실(Virtual Reality, VR)에서 찾아볼 수도 있다. 이처럼 환상(illusion)을 일으키는 장치들이 수 세기 전부터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기술이 도입되면서 이를 좀 더 증폭시키고 있다. 폭넓은 주제들이 생각을 확장해 나갈 수 있는 실마리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상상력연구소에서 사용자-참여자들이 경험을 통해 어떤 것을 발견하기를 기대하나.
이 부분은 설립 취지와도 관련이 있다. 우리가 상상력연구소를 처음 설립하고자 세계 각지에서 이사들이 모였을 때, 런던에 어린이나 가족을 위한 공간이 거의 없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전 세계에 350여 개의 어린이 박물관이 있지만, 창의성에 몰입할 수 있는 적절한 공간을 찾기 힘들었다. 상상력연구소도 처음에는 어린이 박물관의 형태로 시작했는데, 박물관 모델은 너무 오래된 방식이라 여겨졌고, 단순히 놀이하는 것만으로는 혁신을 이루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 후 다양한 기관들을 방문하면서 다른 모델을 추구해 보고자 했다. 그러면서 어린이에 집중되었던 대상을 전 세대를 아우를 수 있도록 확장했다.
런던에는 박물관, 미술관을 비롯해 아주 많은 문화공간이 있는데, 이 공간에서는 항상 누군가의 안내에 따라야 한다. 전시나 공간을 둘러보기 위해 이미 결정된 순서가 있는데, 이런 행동 패턴을 깨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상상력연구소에 오면 관람순서나 방법에 정답이 없고 사용자가 스스로 주도해서 둘러보게끔 되어있다. 또한 런던에는 훌륭한 예술 컬렉션들이 많지만 직접 소통하고 참여하고 몰입할 수 있는 공간은 매우 드물다. 박물관이나 미술관처럼 ‘눈으로만 보세요’가 아니라 직접 만지고 느껴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스스로 공간의 주인임을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상상력 랩을 설계할 때 의도적으로 공간이 바뀔 수 있도록 했고, 더 나아가 사용자가 스스로 공간을 변형시켜 나갈 수 있도록 설계했다. 그 결과 사용자들은 편안한 마음으로 공간을 누리면서 서너 시간씩 보내다 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생각을 지지하고 활동을 권장할 수 있는 역할이 중요하기 때문에 시간의 제약을 두지 않고 얼마든지 편안하게 오랫동안 활동할 수 있도록 하는 환경을 만들어 내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 Imagination Hub
  • Mini Maker Faire
사진 출처 : 상상력연구소 홈페이지 ioi.london
상상력연구소에서는 매우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어떤 분들이 참여자와 소통하며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이끌어 가는가.
사실 그 부분이 지금 상상력연구소가 상설공간으로 자리 잡으면서 개발 중인 부분이다. 다양한 관람객에 따라 여러 가지 실험을 해보고 있다. 첫 번째는 소위 ‘퍼실리테이터(facilitator)’라고 불리는 분들로–앞으로 상상가(imaginator)라고 이름 붙여볼까 생각하고 있다- 예술, 과학기술, 디지털기술 등 여러 학제의 다양한 능력을 갖춘 전문가들이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다. 두 번째는 우리와 협업을 하고 있는 다양한 기업들이 있는데 스타트업부터 대기업까지 외부기관과 파트너십을 맺으면서 개인적으로 기여하고 싶다는 이들도 있다. 예컨대 스타트업의 경우, 기술을 개발하고 있거나 취미로 시작했던 일을 사업화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 세 번째는 영국에서 강력하게 발달한 자원봉사문화를 들 수 있다. 지금까지 250여 명의 훌륭한 자원봉사자들이 참여해주었고 그들이 굉장히 큰 축을 차지하고 있다. 상상력연구소에 대해 관심이 많아서 오기도 하고 우리가 제공하는 여러 가지 도구(tool)나 기술, 교수법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다. 마지막으로 연구 전문가를 들 수 있다. 요즘 4차 산업혁명으로 급변하는 환경에 대한 관심이 쏠리고 있고, 상상력연구소와 협력하는 대기업 중 하나도 미래의 일터가 어떻게 바뀔지, 또 미래의 기술이 우리의 일을 어떻게 변화시킬지 등을 고민하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랩(lab)을 만들어 이런 문제를 직접 보여주거나 연구하고 있는데, 해당 랩의 전문가들과 상상력연구소가 함께 미래의 일터에 대해 학생들과 고민해보는 행사를 진행한 적이 있다.
다양한 분야, 여러 층위의 사람들이 소통하는 일은 쉽지 않을 텐데, 어려움은 없는가.
우리 공간에서는 모두 하나의 언어를 사용하고 공동의 이해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머리로는 상상력을 키우고 마음으로는 웰빙(well-being)을 지향하고 손으로는 뭔가 만들어나간다’는 것에 대한 공통적인 이해이다. 바로 이 점이 공유되면 연령이나 학제 불문하고 어느 정도 공감대가 형성되는 것 같다. 때로는 상상력이라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두려운 존재가 되기도 한다. 우리가 경험한 바로는, 적어도 서구사회에서 상상력이란 매우 허황된 것으로 생각해왔던 경향이 있다. 우리가 끊임없이 설득하고자 하는 것은 상상력이 허황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각을 키워나가는 실체적인 것이고, 일종의 스킬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상상력을 발휘하면 과거와 미래로 시간 여행을 할 수도 있게 된다. 이런 점이 바로 인간만이 가진 고유한 능력이라는 것을 자꾸 상기시키려고 한다.
함께 작업해나가는 데 가장 어려운 그룹은 학부모들이다. 학부모의 입장에서는 아이들이 정해진 활동, 혹은 특정 기술을 익히기 바란다든지, 아니면 뭔가 잘 만들어내어서 그럴듯한 작품 결과가 나오기를 바란다. 하지만 우리는 항상 개방된 결과를 추구해야 한다고 얘기한다. 즉 활동의 방향은 정해져 있지 않고 실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하는데, 부모들 입장에서는 좀 불편해하는 면이 있다. 우리는 실패를 배움의 과정이자 기회라고 생각하지만, 사회적으로는 실패를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지 않나. 우리가 추구하는 방향과 공교육이 추구하고 있는 방향이 달라서 어느 정도 저항이 있다. 계속해서 환경을 개발해 나가다 보면 시간이 지나 자연스럽게 이해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영국에는 ‘광부의 얼굴(coal face)’이라는 말이 있다. 바로 앞의 석탄 캐는 일에만 매몰되어서 큰 그림을 보지 못한다는 의미인데 바로 그런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든다.
한국의 문화예술교육에서도 기능적 학습과 예술적 체험 사이에 나름의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방향을 결정하려면 어떤 평가가 이루어지는가가 중요할 것 같다. 많은 랩을 운영하면서 그 결과에 대해 어떤 평가가 이루어지는지 궁금하다.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행복한 중간지대를 찾으려고 노력하고는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사용자들의 경험과 행복이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배고픈 것조차 잊고 몰입할 수 있는 경험을 주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고 있다. 넓게는 사회적으로 다양한 결과가 나오길 바란다는 것을 알고 있고, 결과를 계획에 반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프로그램마다 등급을 두고 평가단계를 설정하는데, 경우에 따라 단순히 참여자의 만족도로 결과를 평가하기도 하지만 외부 전문가에 의한 정성·정량평가로 판단하기도 한다. 때로는 논리 모델을 설정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목표를 이루기 위한 단계들을 살펴보면서 거꾸로 그런 역량을 키우려면 어떤 환경과 교육을 제공해야 하는지 돌이켜 본다. 평가가 중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연구의 중요성 때문이다. 상상력연구소가 연구소 기능도 하고 있기 때문에 해당 분야에서 현재 어떤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는지 파악하고, 연구자를 초청해 참여자들과 연구할 수 있도록 한다. 최근 ‘메타인지’(Metacognition)에 대한 연구가 주목받고 있는데, 현재 런던 소재 대학에서 석사과정에 있는 학생이 메이킹 랩(making-lab)에서 창의성을 주제로 연구하고 있고, 뇌 과학자와 함께 몰입환경이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미래의 문화예술교육 방향에 대한 견해를 듣고 싶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접어들면서 상상력이 매우 중요한 미래 기술이 될 것이라 생각하고, 일부 사람들은 직감적으로 인공지능(AI)이 상상력을 재현하지 못한다는 점을 알고 있는 것 같다. 일자리가 사라질 것이라는 예측에 두려워하고 있지만, 한편으로 인간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낼 수 있는 여지가 커지지 않을까 하는 긍정적인 각도로도 볼 수 있다. 영국의 공교육은 예술교육보다 STEM–과학, 기술, 공학, 수학을 강조하고 있지만 앞으로 창의적인 부분이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인류의 능력이 빛났던 순간은 예술적인 순간, 바로 딴생각을 하는 순간이다.
상상력연구소는 지난 2년간 런던뿐 아니라 영국 전역에서 5만여 명 가까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등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다양한 기관, 기업과 협력했기 때문이다. 또한 어떤 사용자들이 와서 무슨 경험을 할지, 공간을 어떻게 활용할지 진지하게 고민했고 그 덕분에 인간중심의 공간과 경험을 얻어낼 수 있었다.
톰 도스트(Tom Doust)
톰 도스트(Tom Doust)

영국 어린이박물관이 상상력을 중심으로 재탄생한 ‘상상력연구소’의 경험과 학습(Experience and Learning) 디렉터이자, 학습 경험의 콘셉트 디자이너이다. ‘팝업 파크(Pop up Parks)’의 설립자이며, 예술과 기술을 접목한 교육프로그램 개발·관리에 대한 전문지식을 바탕으로 교육, 문화, 디자인 분야에서의 공공의 참여 및 참여 프로그램을 위해 15년간 활동해왔다.
상상력연구소 ioi.london
사진 _ 이재범(POV스튜디오)
홍은지
홍은지
다양한 공연방식을 고민하고 고안 중인 공연예술 연출가. 얼라이브아츠 코모(alivearts como)에서 여러 분야의 아티스트들과 함께 순간을 채집하고 그 흔적을 담아내고자 노력하고 있다.
<팰름시스트> <카페더로스트> <벙어리시인> 등을 연출했다.
eufy6542@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