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몇 개월 동안 유럽과 아시아의 여러 도시들을 다녀볼 일이 있었다. 한 도시에서 그리 오래 머물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사흘에서 닷새 정도를 머물며 어떤 도시에서든 줄곧 걸었다. 물론 중간에 트램이나 지하철을 타기도 했지만 걷는 것이 압도적이었다. 사실 걷는 것에는 개인적으로 이문이 트인 바가 있다. 몇 해 전 스페인의 산티아고로 향하는 길 900킬로미터를 정직하게 걸어낸 이력도 있다. 하지만 산티아고 가는 길과 도시의 길은 사뭇 다르다. 노란색 화살표를 따라 걷는 산티아고 가는 길은 대부분 흙길이며 도랑도 건너고 때론 산도 오른다. 반면에 이번에 내가 걸었던 도시의 길은 대체로 대로가 아닌 도심의 구시가지 골목길이다. 특히 유럽의 오래된 도시들은 도심 안에 미로 같은 골목길을 여전히 갖고 있다. 골목길을 걷는 것, 아니 그 골목길을 ‘헤매는’ 것이 문화예술교육과 닮았다고 말하면 지나친 얘기일까?

 

# 요즘 젊은이들은 배낭여행을 하면서 절대로 헤매지 않으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듯 스마트폰을 코앞에 들이대고 다니는 것을 여러 번 목격했다. 마치 자로 재듯이 사전에 가야 할 맛집과 명소를 검색해서 그것을 길찾기 프로그램에 넣어 스마트폰 네비게이션이 일러주는 대로 찾아간다. 딴 데 한 눈을 팔 겨를도 없다. 오로지 네비게이션의 하수인처럼 스마트폰에 눈을 내려 박고 목표점만 찾아서 가는 것이다. 이렇게 걷다 보면 목표한 지점을 쉽게 찾을 수는 있을지 몰라도 정작 더 많은 것들을 지나치기 쉽다. 인터넷에서 검색해 알아둔 맛집을 찾을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보다 특색 있는 더 많은 집들은 놓쳐버리고 마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이렇게 매우 제한된 목표점만 찾아가는, 스스로를 인간 네비게이션화 하는 것을 피하려면 역설적으로 두리번 거리고 어슬렁거리는 것이 상책이요, 묘책이다. 그러다 보면 예기치 않게 걸려드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독특한 장소를 마주하기도 하고, 뜻밖에 자기 만의 맛집을 만나기도 한다. 그러면서 눈이 트이고 안목이 생기는 법이다. 문화예술교육이 존재한다면 바로 이런 것이어야 하지 않겠나 싶다.

 

# 다소 역설적인 얘기일지 모르지만, 헤매봐야 길을 안다. 도시를 헤매듯 걸어 다니면 차를 타고 다닐 때보다 그 도시를 훨씬 빨리 파악하게 된다. 차를 타고 다니면, 특히 남이 운전해주는 차를 타면 아무리 다녀도 어디가 어딘지 모르기 십상이다. 물론 무작정 걷기만 한다고 길을 터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리적인 인식을 갖게 되는 것은 적어도 다음과 같은 3박자가 맞아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순차적인 것이 아니라는데 주목할 점이 있다.) 우선 대략적인 지도가 어느 정도 눈에 들어와야 한다. 그 지도 위에서 역 특히 중앙역은 어디에 있는지, 큰 성당과 같은 지형지물은 또 어디에 있는지 대략으로나마 아는 게 중요하다. 하지만 머릿속 지도는 걷다가 실제로 그 지점에 닿는 순간이 아니면 절대로 현실화되지 않는다. 관념 그 자체로는 무용지물이다. 걸어서 도달한 현장에서 마주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따라 머릿속에 대략적인 윤곽으로 그린 지도는 하나하나 채워지고 완성되는 셈이다. 문화예술교육도 이와 다르지 않다. 이를테면 예술사는 하나의 대략적인 인식의 지도다. 그리고 위대한 예술가들의 삶과 작품은 그 자체가 지도 위에 굵직하게 박힌 지형지물이요 랜드마크인 셈이다. 하지만 이것들을 머리로만 알면 별반 소용없다. 발품을 팔아 직접 가보고 위대한 작가의 삶의 흔적과 그 숨결을 느껴보며 그의 진품과 마주해 봐야 한다. 실행하고 부닥치고 도전해봐야 진짜 자기 것이 되듯, 삶과 예술의 관념적 지도 역시 몸을 써서 움직이고 애써 그 세계로 몰입하며 몸부림쳐봐야 현실 위에 구현되어 미로를 헤쳐나갈 눈을 밝혀주는 법이다.

 

# 적어도 내가 걸어본 경험치에 따르자면, 미로 같은 골목길의 최고봉은 역시 베니스의 운하 사이 사이로 난 길이다. 암스테르담도 운하가 있지만 베니스와 같은 골목길은 거의 없다. 베니스의 골목길은 한 사람이 간신히 지나갈 만큼 아주 좁은 골목길들이 수두룩하다. 하지만 그런 골목길 사이사이에 매력적인 가게가 있고 맛집이 있으며 우리가 다 알지 못하는 진짜 보석 같은 공간들이 숨어 있다. 문화예술교육이 진정으로 가능하다면 그것은 스스로의 발품을 팔아 애써 골목길을 뒤져 그런 보석 같은 것들을 골라내는 안목을 갖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안목이 커져야 행위도 달라진다. 안목 없이는 어떤 행위도 예술일 수 없다. 흔히 예술은 창조적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처음부터 창조적이긴 어렵다. 아니 거의 불가능하다. 창조는 안목 있는 행위의 거듭된 반복 속에서 가능한 일이다. 보는 눈, 골라내는 눈, 다른 것을 발견하는 눈, 그 눈이 꼭 필요한 것이다. 골목길을 헤매봐야 그런 눈도 생긴다.

 

# 꼭 프로패셔널한 아티스트가 되는 것이 삶의 지향점이 아닐지라도 예술의 경험은 또 하나의 극한을 경험해 보는 것이리라. 이제 중학교에 진학하는 막둥이 내 딸은 여러 해 전부터 발레를 배우고 있다. 그냥 취미 삼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진짜 발레리나가 되겠다는 꿈을 갖고서, 옆에서 봐도 미친 듯이 한다. 남이 시킨다고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아니다. 그것은 자기 안의 뭔가가 꿈틀거리며 작동한 것이다. 마치 골목길 미로 안에서 자기만의 맛집을 발견한 셈일지 모른다. 하지만 발레는 원한다고 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다른 예술장르도 그렇겠지만 특히 발레는 성장하면서 신체 조건이 맞지 않으면 아무리 더 하려 해도 안 된다. 이를테면 키가 너무 크다거나, 혹은 너무 작다거나. 억지로 큰 키를 줄일 수 도 없고 작은 키를 늘일 수도 없다. 하지만 그렇게 반드시 자기 의지와 비례하지만은 않는 미래의 불투명에도 불구하고, 자라나는 시절에 뭔가에 미쳐볼 수 있다는 것은 삶의 분명한 자양이 될 뿐만 아니라 자기 삶을 개척하는 나침반이 된다. “미쳐야 미친다”(不狂不及, 불광불급)란 말이 있다. 예술이란 뭔가에 미치는 것이다. 뭔가에 진정으로 미치지 않고서는 삶의 미로 같은 골목길을 헤쳐 나올 수 없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문화예술교육이란 미로 같은 삶의 골목길을 헤매다 자기만의 뭔가를 발견하고 그것에 미쳐보는 경험을 갖게 하는 것이리라.

 

# 우리의 예술교육이 너무 뻔한 대로(大路)만 찾아 다니는 것은 아닌지, 또 차에 탄 채 늘 다니던 길만 반복적으로 다니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골목길에 들어가 헤매는 일을 시간낭비요, 불필요한 일이라고 치부해 버리며 문화예술교육 자체를 기능적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보다 본질적으로 말하자면, 예술은 가르친다고 또 배운다고 다 되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외롭고 모질게 스스로 터득해가는 길이다. 물론 도움을 줄 수도 있고,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 도움이 될지 안될지는 사람과 경우에 따라 모두 다를 수 있다. 그만큼 문화예술교육은 정형화되어 있지 않고, 그 어떤 정답도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문화예술교육이 너무 목표지향적이거나 기능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진정한 문화예술교육은 미로 같은 골목길을 걸으며 이렇게도 부닥쳐보고 저렇게도 부닥쳐보면서 비정형적인 방식으로 자기만의 진화의 길을 개척해보는 과정일 것이다. 그런 가운데 자기만의 뭔가를 발견하고 거기서 또 다른 길을 열어갈 수 있다면 그 역시 미래에 누군가가 참고하고 흠모할 예술사적 인식지도 위의 또 하나의 랜드마크가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

정진홍

정진홍 _ 글
컨텐츠 크리에이터, GIST다산특훈교수, 한국문화기술연구소 소장

 

* 외부 기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