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사람들이 ‘새해 첫날 듣는 노래’에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새해 첫날에 듣는 노래가 그해의 무드를 결정한다나. 주로 <파이팅 해야지> <이루리>처럼 희망찬 가사의 노래를 고른다. ‘새해송’은 (비교적) 최근에 생긴 문화지만, 그와 비슷한 믿음을 가진 분의 보호 아래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1월 1일의 유난스러운 분위기가 사실 익숙하다.
우리 엄마는 1월 1일에 어떤 하루를 보냈는지에 따라 그해의 운이 결정된다고 믿는 사람으로. 우리 집에서는 새해 첫날만은 늦잠을 자서도, 짜증을 내서도, 동생과 싸워서도, 반찬 투정을 해서도, 아빠에게 혼날 짓을 해서도 안 됐다. 대체로 평소에도 금지된 일들이지만, 새해 첫날에 저런 행동을 하면 엄마가 너무 실망하기 때문에(정말 나라를 잃은 것처럼 슬퍼한다. “올해는 망했다”면서. 하하. 차라리 혼을 내지). 그간 1월 1일은 다소 가식적으로 보냈다. 지적받기 전에 이부자리 정리를 하고, 아침부터 환기한다고 문을 활짝 여는 엄마에게 짜증을 내지 않고(추워!), 새해 계획을 세우고 일찍 잤다.
엄마와 떨어져 산 지 꽤 됐지만 독립 이후에도 매년 1월 1일은 건강하게 보내려고 노력해 왔는데…. 속상하게도 2024년 1월 1일은 여러모로 엉망이었다. 친구와 싸워서 울다 지쳐 잠드는 바람에 제야의 종소리도 못 들었고, 퉁퉁 부은 눈으로 달리기하러 나갔다가 감자탕에 소주를 마시고 대낮부터 취해서 뻗어 있었다. 해가 지고 나서야 겨우 일어나서 떡국 대신 (해장용) 소고기뭇국을 끓여 먹으며 생각했다. 이거 엄마가 알면 난리 나겠다. 밤 열한 시. 새해 첫날을 한 시간 남기고 테이블에 앉았다. 그래 일기라도, 일기라도 쓰자. 일단 빈칸으로 남아있는 12월 31일 일기부터. 3년 일기장을 쓰고 있어서 일기를 쓸 때마다 작년 오늘을 자동으로 돌아보게 되는데 이런 내용이 남아있다.

2022년 12월 31일

편의점에서 안주 잔뜩 사다가 맥주 마시면서 연말 시상식 보는 소소한 연말. 2023년 새해 계획을 세웠다. 계획은 이루어지지 않아도 좋으니 자주 웃고 싶다.

자주 웃었나? 연말 회고를 제대로 못 해서 확신할 순 없지만 대충 그랬던 것 같다. 이번엔 하지 못했지만(두루두루 망한 연말연초군요), 사실 매년 연말에 한해를 리뷰하는 시간을 갖는다. 그동안 남긴 기록들, 일기나 사진, 메모 같은 것을 다시 훑어보면서 ‘올해의 ○○’ 같은 것도 좀 뽑아보고, 내년 계획도 세운다. 일 년을 정리하는 나만의 리추얼인데, 이게 삶의 방향성을 잡는 데 꽤 도움이 된다.
있어 보이려고 ‘회고’, ‘리뷰’ 같은 멋진 말을 가져다 붙였지만, 그냥 ‘의미를 가져다 붙이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 그건 내가 아주 잘하는 일이다(나는 11년 차 에디터이고 에디터라는 직업은 무에서 의미를 ‘착즙’해내는 일을 한다). 우리가 하는 모든 경험에는 나름의 배울 점이 있다. 만약 배울 점이 없는 일이라면 하다못해 느낀 점이라도 있다. 이를테면 “이딴 경험은 다신 하지 말자”라든가. 아무튼 이걸 하고 나면 건강한 마음으로 나를 다독이며 한 해를 마무리할 수 있게 된다. 아무것도 이룬 게 없는 것 같아도 이렇게나 많은 일을 해냈구나. 비록 오늘은 외롭고 쓸쓸하지만, 한때는 다정한 사람들과 좋은 시간을 보냈었구나.
이렇게 정리한 연도별 연말 회고 기록은 노션에 차곡차곡 놓아둔다. 그리고 길을 잃어 막막한 날에 꺼내 읽는다. 한해의 첫날을 시원하게 망친 오늘 같은 날 말이다. 생각난 김에 <올해의 기분 좋은 순간>을 아카이빙 해둔 페이지를 열어 봤다.

1월 17일

바쁜 와중에 나를 내팽개치지 않고 여러 일을 해내고 있다. 편지지를 잔뜩 사고 주인 없는 선물을 사서 기분이 좋았다. 식탁보를 새로 갈았더니 그것도 기분이 좋네.

1월 29일

날이 모처럼 따뜻해서 뛰었다. 몸을 움직여 땀을 내면 기분이 좋고 머리도 맑아진다.

3월 8일

술 마시고 집에 가는데 갑자기 걷고 싶어져서 서촌까지 걸었다. 밤공기가 좋으면 용기가 난다. 이날은 그래도 외롭지 않고 기분이 괜찮았다.

4월 1일

밀린 일기를 썼더니 기분이 나아졌다. 일기가 밀리면 인생을 잘못 사는 기분이 든다. 뭐라도 쓰자.

‘기분 좋은 순간의 모음’을 읽는 것만으로도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행복으로 가는 지도를 얻은 것처럼 든든했다. ‘어떻게 하면 행복해지는지 알았으니 올해는 이대로만 하면 되겠다’ 싶었다.
새해다운 의욕을 재충전했으니, 남은 2023년 회고부터 조금씩 마무리해야겠다. 사실 이번부터는 시각적인 기록들도 아카이빙 해두고 싶어서, 매월 그달에 찍은 사진이나 영상을 열 장씩 골라 인스타그램 게시물로 올리는 작업을 시작했는데(한 게시물 당 최대 10장까지 올릴 수 있다) 3월까지 하다가 말았다. 내일부터 다시 해야지. 원래 진짜 새해는 설날부터니까. 만회할 수 있는 시간이 아직 한 달이나 남아있다.
일단 12월 31일의 빈칸을 채워볼까.

2023년 12월 31일

‘계획은 이루어지 않았지만 자주 웃긴 했던 것 같다.’

P.S. (소곤소곤) 여러분만 알고 계세요. 사실 새해는 원래 세 번 옵니다. 양력 1월 1일, 음력 1월 1일. 그리고 새 학기가 시작되는 3월 2일에 진짜 새해가 오죠. 그러니 우리 내일부터 잘하면 돼요. 진짜로요.
김혜원
김혜원
걸어서 갈 수 있는 곳까지가 우리 동네라고 생각하는 산책왕. 매일 일기를 쓰고 일기로 인생을 배운다. 10년 차 에디터이자 에세이 작가로 활동 중이다. 주간지 [대학내일]에서 에디터로 일했고 현재는 트렌드 당일 배송 미디어 <캐릿>을 총괄 디렉팅하고 있다. 에세이 『나를 리뷰하는 법』 『작은 기쁨 채집 생활』 『달면 삼키고 쓰면 좀 뱉을게요』 등을 썼다.
인스타그램 @cerulean_woonee
사진제공_김혜원 캐릿 총괄디렉터·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