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른다는 말로 도망치는 사람과 모른다는 말로 다가가는 사람, 세계는 이렇게도 나뉜다.”
뮤지션이자 작가인 요조의 책 『실패를 사랑하는 직업』을 펴는 순간 마주친 문장이다. ‘모른다’는 말이 가진 양면성 앞에서 나는 어느 쪽인가. 아마도 생존을 위한 회피 본능과 그럼에도 어쩔 수 없는 호기심 사이에서 매일 매시간 휘청거리며 횡단하는 사람에 가까울 테다. 일을 하면서 혹시 도파민 중독인가 싶을 정도로 무언가에 매혹되어 폭주 기관차처럼 내달리다가, 어느 순간 주저하고 도망치며 자괴감에 시달린다. 다시 용기 내어 성큼성큼 가고 있는 나 자신에 내심 뿌듯해하다가 갑자기 후회가 밀려와 뒷걸음질 친다. 후회란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경로를 선택했을 때 벌어질 일을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하는 인간의 고등한 능력’이라는 얘기가 그럴듯한 위안이 될 때도 있다.
우연한 성공은 있지만, 우연한 실패는 없다고 한다. 이 세상에 실패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나. 우리는 나름의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탁월한 성취나 성공 뒤에서 결정적 요소로 작용하는 ‘운’의 역할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공모 지원사업을 예로 들어보자. 사업계획의 타당성, 사업목적과의 부합도, 추진능력 등 심의 기준은 명확해 보이지만, 사실 그해 해당 중앙부처나 지자체 또는 공공기관의 가용 예산 규모, 분야별 지원신청 경쟁률, 심의위원 특성에 따라 나의 기획은 현장에서 바로 실현될 수도 있고, 불확실한 다음을 기약하며 컴퓨터 하드에서 잠잘 수도 있다.
그런데 본질적으로 성공은 뭐고 실패는 뭔가. 막상 구분하고 정의하려 들면 만만치 않다. 고등생물이라는 우리의 뇌는 생각보다 게을러서, 어떤 사건과 경험의 과정과 결과를 애써 읽고 적확한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다면 ‘성공’ 혹은 ‘실패’라고 쉽게 단정하며 자화자찬의 정신 승리 혹은 자기학대의 늪에서 허우적대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하며 잊어버리기 마련이다. 공(功)과 과(過)가 모두 드러나는 경로를 기꺼이 보여주고 공유할 수 있는 용감한 입과 함부로 비난하지 않고 경청하는 귀는 그래서 늘 귀하다. 성공의 반대말은 어쩌면 실패가 아니라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음’에 있을지 모르니, 먼저 시도한 사람은 0에서 100에 이르는 다양한 스펙트럼에서 나의 이야기가 어디쯤 위치해 있는지 알려줄 책임이 다음 사람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다시 시도하라. 그리고 다시 실패하라. 더 잘 실패하라’라는 사뮈엘 베케트의 말이 무책임한 채찍질이 아니라, 안전한 비빌 구석처럼 느껴지려면 말이다.
필자는 어쩌다 보니 20년 넘게 공공영역에서 일해 왔다. 돌이켜보면 누가 봐도 분명한 ‘폭망’의 경험은 다행히 없었다. 공공 분야는 ‘초대박’도 ‘폭망’도 제어하는 촘촘한 제도적 장치가 있어서이기도 하고, 대범하면 대패하고 소심하면 불패한다는 ‘소심불패’의 전략이 내 성향과 얼추 맞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원대한 꿈을 담은 계획이 문서에서 현실화하는 단계로 넘어갈 때 예측하지 못했던 조건과 상황 때문에 공모 선정된 대형 프로젝트를 눈물을 머금고 포기했던 적도 있고, 갖은 힘을 다해 출항시킨 프로젝트 배가 산으로 가다가 급기야 좌초하는 걸 무기력하게 지켜본 적도 있다. 모두가 내심 올해는 망했다고 생각했던 행사였는데도 낯 뜨거운 상찬이 오가는 결과보고회 자리가 초현실주의 연극 무대처럼 느껴진 순간도 있었다.
잠 못 들고 이불킥하며 되새김질했던 아쉬운 기획도 수두룩하고, 미처 시도하지 못한 기획은 더 많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히 잘해왔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다가 문득 이 모든 게 그냥 다 실패의 알리바이인가 싶은 현타의 순간엔 뭘 해야 하나.
‘모든 방법이 실패하면 포기하고 도서관에 갈 것.’ 그래서 나는 도서관에 갔다.
– 스티븐 킹, 『11/22/63』 중
여러분은 어디로 달려가는가. 누구나 마지막 비빌 언덕, 최후의 보루 하나쯤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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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옥
이선옥
한량처럼 살고 싶은 소음인. 하자센터,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예술경영지원센터를 거쳐 수원문화재단 책문화부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4년 문화예술교육 허브사이트 ‘아르떼’와 [웹진땡땡]을 만든 시조새였던 이유로 웹진 [아르떼365] 편집위원을 맡고 있다.
dal031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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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이미지_도서관 제3의 시간
사진제공_이선옥 수원문화재단 책문화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