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이 우리 삶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물으면 십중팔구 사람들은 ‘아름다운 것을 만드는 일’ 내지는 ‘아름다운 그림이나 조각으로 보는 이를 즐겁게 해주는 일’을 꼽는다. 또는 ‘현실의 고단함에 치인 사람들 마음을 위로하고 심리적으로 치유시켜준다’거나 ‘문화 예술의 교양을 높여주고 감각을 세련되게 해 준다’와 같은 답을 내놓는다. 모두 맞는 얘기다. 우리는 아주 어린 시절 부모님이 사다 준 크레파스와 스케치북으로 뭔가를 그리기 시작했을 때부터 학교 교육을 받는 내내 미술이 그런 일을 한다고 들었고 배웠다. 또 성인이 되어 사회생활을 하면서는, 정작 일 년에 단 한 번도 미술관이나 갤러리에 발걸음을 하지 않지만, 미술은 어딘가에서 여전히 아름다운 것들을 보여주고 감상자들은 즐거움과 교양을 얻을 것이라 믿고 있다.

 

여기서 잠깐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팝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Andy Warhol)에 얽힌 이야기를 하나 풀어보자. 그는 1964년 뉴욕에서 개최된 세계박람회(World’s Fair)의 뉴욕 주립 관(New York State Pavilion) 외벽을 장식할 작품을 시 당국으로부터 의뢰받고 <긴급 수배범들(Most Wanted Men)>이라는 실크스크린 작품을 제작했다. 당시 워홀은 의문의 죽음을 당한 여배우 마릴린 먼로나 암살당한 케네디 대통령의 미망인 재클린 케네디 등 유명인을 실크스크린 초상화로 발표해 대중들 사이에서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다. 또 뉴욕 주립 관 작품을 위촉받은 10명의 미국 미술가 중 한 명에 들 정도로 주목받는 작가였다. 하지만 뉴욕시 당국은 워홀의 <긴급 수배범들>이 설치된 당일 그 그림을 은색으로 지울 것을 작가에게 요청했다. 명시적인 이유는 그 벽화가 흉악범들의 사진을 흑백으로 인쇄한 별로 아름답지 않은 그림으로 사람들의 정서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뿐만 아니라 뉴욕을 대표하는 이미지로도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물론 드러나지 않은 이유가 더 결정적이었다. 당시 뉴욕 주지사는 그 그림 속 ‘긴급 수배범들’ 다수가 이탈리아 출신이어서 미국 내 이탈리아 이민자들의 반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고, 그로 인한 일정 정도 정치적 손실을 우려하여 워홀의 벽화를 지우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압박 또는 정치적 검열에 작가 자신은 의외로 순순히 응했다. 행정 권력이 예술의 자율성을 위축시키고 있다거나, 사람들이 저급한 미의식으로 작가의 창작 의도를 훼손시켰다거나 하는 따위의 반박 한 마디 없이 그림을 그 날로 지워버리고 나중엔 철거해버렸다. 그러나 워홀은 ‘공장(Factory)’이라 부르던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그 이미지를 캔버스 작품으로 다시 제작해 유럽에서 열린 중요 전시에 내놓았다. 미국 대중들에게는 꽃이나 미키마우스처럼 노골적으로 상투적인 이미지들을 활용한 작품을 선보였고 말이다. 워홀은 왜 그랬던 것일까?

 

앞서 소개한 사람들의 미술에 대한 인식은 지극히 평범하고 비전문적이어서 특별한 권력을 갖고있는 것 같지 않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 평범하고 비전문적인 통념이 매우 자주 미술가들의 실험, 특별한 철학을 담은 작품, 기존의 미의식과는 다른 예술의 창안을 금지하거나 억압하는 결정적 힘을 발휘한다. 미술이 사회적으로 무엇인가 생산적이며 논쟁적인 대화를 촉발하고, 타율적인 감수성이나 정서의 틀을 벗어나 더 다양하고 자발적인 미의 발명과 향유의 길을 열어나가려 할 때 앞을 막아서고 의지를 꺾어버릴 수도 있다. 예컨대 워홀의 벽화에 그랬던 것처럼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은 상태로 되돌려버리고, 그저 통념적인 미술과 미술의 역할을 지키라고 강요할 수도 있다. 우리가 무엇이든 미술이 되는 시대를 살면서도 미술이란 ‘예쁜 것, 잘 그린 것, 마음을 위로해주는 것’ 등등 고루한 답을 하는 이유가 거기 있다. 워홀은 그런 대중의 힘에 굴복했다기보다는 대중의 수준이 그렇다면 기꺼이 응하되 정작 자신은 더 나은 대중을 찾아 나선 경우다. 자신의 팝아트에서 ‘아메리칸 드림’과 ‘미국에서의 죽음(death in America)’이라는 주제를 읽어내고 성찰할 수 있는 대중에게만 워홀은 향유의 기회를 주었다. 그 반대에는 침묵하면서. 그것은 반박보다도 더 무서운 저항이다. 또는 뛰어난 예술을 수용할 준비가 안 된 이들에게 보내는 미술가의 차별이다.

 

그러나 현대미술의 특정 부류는 대중 혹은 그런 모호한 이름으로 불리는 사회적 다수의 생각을 끈질기게 변화시키고 설득해 나가는 일을 자신의 역할로 삼아왔다. 비단 사회 비판적 메시지가 강한 작품들만을 이르는 것이 아니다. 순수하고 고급한 미술(fine art, high art)을 표방하면서 벽에 걸린 그림이나 좌대 위에 놓인 조각만을 미술로 취급하고 그것을 소수 컬렉터에게만 제공하는 미술계를 벗어나,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인 기능을 하는 참여형 미술이 거기에 포함된다. 수많은 예가 떠오르는데 여기서는 굵직한 사례 하나만 살펴보자.

 

1987년 미국의 ‘어머니날’ 공공미술가 수잔 레이시(Suzanne Lacy)는 미국 미네아폴리스의 한 빌딩에서 3천여 관객이 지켜보는 가운데 <크리스털 퀼트(Crystal Quilt)>라는 제목의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빨간색 카펫이 깔린 거대한 홀에 백여 개 정도의 정사각형 테이블이 다이아몬드 형태로 배열돼 있고, 백인 흑인 유색인 가릴 것 없이 60세 이상 430명 여성들이 노란색 또는 빨간색 러그가 덮인 테이블에 네 명씩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그녀들은 다만 앉아서 자신들이 이제까지 살았던 삶, 이를테면 육체적 노화부터 도시 생활에서 겪는 개인적인 고민들을 서로와 나눌 뿐이다. 그리고 십 분에 한번씩 테이블에 올려둔 팔의 위치를 바꿔 서로 손을 잡거나 깍지를 끼며 퍼포먼스 전체의 풍경을 바꿔간다. 당시 이를 위에서 지켜본 사람들에게 그 풍경 자체가 고립된 삶이 아니라 서로를 환대하고 서로가 연대하는 삶의 퀼트로 보였다. 또 산업사회가 불필요한 존재 또는 잉여로 취급하는 나이 든 여성들이 생생한 목소리를 가진, 자신들의 경험과 욕망을 표현할 수 있는 존재임을 새삼 깨달았다. 물론 그 퍼포먼스에 참여했던 430명 여성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또한 스스로를 가치 있고 소중한 존재로 여겼을 것이다.

 

이제 레이시의 <크리스털 퀼트>는 비디오자료로만 남아 있다. 하지만 이 작가의 미술은 그녀가 당시 주창했던 “새 장르 공공미술(new genre public art)”의 상징이 되어 지속적으로 회자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글에서처럼 회자되는 가운데, 우리의 의식과 감수성 안으로 스며들어와 우리와 함께 사회적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예쁘지도 않고, 잘 그리거나 잘 만들어 그대로 보존된 작품도 아니지만 말이다.

 

 

수잔 레이시(Suzanne Lacy)의 크리스털 퀼트(Crystal Quilt) 참고영상 보기 : http://www.tate.org.uk/

 

 

글 | 한국예술종합학교 학술연구교수, 미술평론가 강수미

시각예술, 미술세계에서 인간의 삶을 들여다본다! 홍익대 회화과에서 학사,석사 학위를 받았고 미학과에서 박사학위(발터 벤야민 사유에서 유물론적 미학 연구)를 받았다. 2005년 《번역에 저항한다》 전시기획으로 올해의 예술상(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07년 제 3회 석남젊은이론가상 (석남미술이론상운영위원회)을 수상했다. 지난 해 출간한 《아이스테시스》는 문화체육관광부 우수학술도서-철학 분야로 선정되기도 했다. 통찰력 있는 강의로 명쾌한 이해를 끌어내는 미술평론가 강수미는 깊이 있는 문화예술 이야기, 미술 세계를 통해 인간의 삶과 문화예술의 기원에 대한 전문가적 해석을 들려주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