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역할을 못하는 공간은 버려지게 마련이다. 사람들의 통행이 줄고, 쥐가 드나든다. 거미가 집을 짓고, 곰팡이가 핀다. 버려진 기간이 길어져 ‘흉물’이 돼버린 사례도 흔하다. 특히 대형 공장이나 소각로 같은 산업시설은 규모가 크고, 시설이 특수한 탓에 처분하기도 어렵다. 산업시설이 문을 닫으며 인구가 급격히 줄거나, 도심 개발로 인구가 줄면서 산업시설이 문을 닫는 사례가 많다. 북적거리던 공간은 이렇게 서서히 빛을 잃는다.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체부’)와 지방자치단체가 2014년부터 ‘폐산업시설 문화재생 사업’으로 이런 곳을 되살리고 있다. 절반씩 돈을 내 버려진 산업시설에 문화의 숨을 불어넣어 활력 넘치는 곳으로 바꿔보겠다는 취지다. 기자로서 이런 곳의 실태를 확인하고 싶었다. 어떻게 바뀌었을까, 어떤 문화예술 활동이 펼쳐질까, 어떻게 운영할까, 그리고 돈값은 제대로 할까.
자료를 찾아보니 2014년 4곳, 2015년 6곳, 2016년 6곳, 2017년 6곳, 2018년 3곳의 모두 25곳이 사업에 선정돼 새로 문을 열었다. 문체부에서 우선 10곳 정도 추천을 받아 지역 안배를 고려해 5곳을 골랐다.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이하 ‘교육진흥원’) 도움으로 담당자, 혹은 책임자와 인터뷰도 진행했다. 기사는 1곳당 1개 지면씩 모두 5회에 걸쳐 [서울신문]에 게재됐다. 충북 청주 ‘동부창고’(10월 9일자), 제주 삼도2동 ‘예술공간 이아’(10월 23일자), 부산 수영구 ‘F1963’(11월 13일자), 경기 부천시 오정구 삼정동 ‘부천아트벙커B39’(12월 4일자), 전북 전주 덕진구 ‘팔복예술공장’(12월 21일자)이다.
F1963
개성 넘치는 폐산업시설
기자가 찾아간 5곳은 모두 나름의 사연과 특색이 있었다. ‘동부창고’는 1960년 지은 7개 동의 담뱃잎 저장창고 시설 가운데 3개 동을 고쳐 쓴다. 2004년 문을 완전히 닫았고, 청주시가 이를 사들여 아파트를 지으려 했지만, 지역 예술인들이 “문화적 보존 가치가 높다”고 나서면서 새로운 기회를 맞았다. 사업 선정 이후 2015년 10월 새 모습을 선보였다. 3개 동을 다목적홀, 갤러리 등으로 대관하거나, 공연예술 연습공간으로 쓴다. 대관비가 저렴해 시민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예술공간 이아’는 제주대학교가 2009년 병원을 제주시 아라동으로 이전하며 위기를 맞았다. 인근 공동화 현상과 맞물려 방치되다시피 했다. 2015년 사업에 선정됐고, 문체부와 제주시가 각각 25억 4500만원 씩 들여 예술공간으로 만들었다. 갤러리, 교육 공간, 입주작가 공간(레지던시)으로 구분해 운영한다. 특히 갤러리는 전시 수준이 상당히 높다. ‘F1963’은 고려제강이 1963년부터 2008년까지 45년 동안 와이어로프를 생산하던 공장을 고친 곳이다. 전체 면적이 2만 2,279㎡(약 6,740평)이나 된다. 2008년 공장 이전 이후 그대로 방치됐다가 2016년 부산비엔날레를 열면서 주목받았다. 2017년 사업에 선정됐다. 문체부와 부산시가 12억 7000만 원씩 내 시설을 고쳤다. 여기에 고려제강이 민자로 35억 원을 내고, 별도로 100억 원을 추가로 더 냈다. 갤러리를 비롯해 거대한 전시공간을 자랑한다. 문화예술 시설에 중고서점, 커피숍, 맥주집, 원예점등 상업시설이 공존하는 게 인상적이다.
지난해 6월 문을 연 ‘부천아트벙커 B39’는 폐기된 쓰레기 소각장의 원형을 잘 살렸다. 전체 면적 8,335㎡(약 2,520평)의 5층짜리 대형 소각장인데, 주요 시설을 그대로 살린 덕분에 쓰레기의 이동 경로를 알 수 있게 했다. 39m의 소각장 ‘벙커’는 중정 형태의 ‘에어 갤러리’로 연결되고, 이어 ‘재벙커’로 이어지는 형태다. ‘팔복예술공장’은 예전 카세트테이프 공장이던 쏘렉스 공장이 있던 곳이다. 1992년 공장이 완전히 문을 닫고서 임대를 시도했지만 잘 되질 않았다. 전주시가 공장을 사들여 고친 뒤 2018년 문을 다시 열었다. 제주 ‘예술공간 이아’와 마찬가지로 레지던시를 운영한다. A동 1층에 예술가 12명이 입주했다.
  • 동부창고
  • 이아
방문객 많아 활력 넘쳐
5곳 가운데 어디가 좋고, 어디가 별로였는지 답하긴 어렵다. 투입한 예산이 모두 달랐고, 입지 조건도 모두 달랐다. 또, 지역 사회의 요구에 맞춘 저마다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그래서 일괄적인 비교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굳이 눈여겨봐야 할 부분을 꼽으라면 ‘방문객’을 들겠다. 예컨대 동부창고는 방문했을 당시 진행하던 굵직한 행사가 끝난 데다가, 전시회 역시 막판이어서 관람객이 예상보다 훨씬 적었다. 넓은 창고 공간에 방문객이 거의 없어 주말에 다시 찾아 취재했을 정도다. 전시회가 아무리 좋아도 사람이 찾지 않는다면 무용지물이다. 예술공간 이아가 대표적인 사례다. 방문했을 때 《회화의 귀환》 전시회가 한창이었는데, 미술에 문외한인 기자가 봐도 상당히 수준이 높았다. 이경모 센터장은 이와 관련 “수준 높은 작품으로 공간이 가진 가치를 상향시키는 전략을 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말에는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주변 시민은 “잘 모르겠다”는 반응이 많았다.
이런 점에서 F1963은 주목해야 할 사례다. 버스를 타고 골목을 한참 지나야 도착할 정도로 접근성이 좋지 않음에도, 항상 사람들로 북적인다. 시설 가운데 하나인 ‘YES24 중고서점’은 전국 YES24 분점 가운데 가장 큰 곳이다. 중고 서적을 워낙 많이 갖춘 데다가 공간 구성이 훌륭해 가족 단위 방문객으로 온종일 북적였다. ‘테라로사 커피’는 강원도에 있는 유명한 카페의 분점인데, 토요일 오후 방문했을 때 연인들로 빼곡했다. 방문객들은 책방에 들렀다가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즐기고 커피나 맥주 한잔 마시다 오후에 공연을 본다. 상업 공간, 전시 공간, 산책할 수 있는 공간 등을 잘 구성해 종일 있어도 지루하지 않을 정도였다. 최윤진 부산문화재단 문화공간팀장은 “산속에 문화예술 공간 하나만 덩그러니 있다면 성공하겠느냐”면서 “시민들은 상업시설과 문화예술 공간이 함께 있는 걸 좋아한다”고 했다. 문화예술 공간의 정체성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상업시설과 시너지 효과를 낸 좋은 사례다.
  • 부천아트벙커 B39
  • 팔복예술공장
레지던시+교육 시너지
방문객이 많이 오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을 하느냐도 중요하다. 그 무엇으로 ‘레지던시’와 ‘교육’ 프로그램을 들고 싶다. 레지던시는 예술공간 이아와 팔복예술공장 두 곳에서 운영한다. 예술공간 이아는 9개 작업실을 갖췄는데, 두 번의 공모 모두 350팀 이상씩 지원했다. 40대1의 경쟁률을 뚫고 들어온 젊은 작가들에게 예술공간 이아는 제주를 주제로 한 작업을 적극적으로 권장한다. 팔복예술공장은 산업단지 한복판에 있다. 그러나 작가들은 오히려 이를 좋아한다. 입주 작가인 정진용 작가는 “주변 공장의 흔치 않은 오브제에서 영감을 얻곤 한다”고 말했다. 레지던시는 작가의 작업을 돕는 동시에, 작업물을 갤러리에 전시하는 식으로 ‘선순환’을 만들어낸다. 지역 예술 수준을 한층 높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이렇게 구성한 작가 풀은 나중에 큰 자산이 된다.
기자가 팔복예술공장을 방문했을 때 교육진흥원의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인 ‘꿈꾸는 예술터’가 시범 운영 중이었다. 학교 밖 유휴공간에서 진행하는 교육 프로그램으로, 자유학기제를 맞은 인근 중학생 40여 명이 공장에서 즐겁게 예술을 배우고 있었다. 특히 레지던시에 거주하는 예술가가 학생을 가르치도록 했는데, ‘레지던시+교육’의 훌륭한 사례다. 교육 프로그램은 사실 다른 4곳에서도 소소하게나마 운영 중이다. 다만, 소수 시민을 대상으로 하거나 일회성에 그치는 사례가 대다수였다. 자유학기제의 경우 한 학기 이상 지속하는 데다가, 학생들에서 학부모로 입소문이 날 수 있다는 점에서 다른 시설들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게 좋겠다.
‘버려진 공간을 살린다’는 원래 목표에 비춰볼 때, 폐산업시설 문화재생 사업은 우선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 돼야 한다. 그러나 일회성이 아닌 정기적인 유입으로 이어져야 한다. 외관이 독특하다고, 전시회 공간만 잘 꾸며놓는다고 사람들이 저절로 찾고, 다시 찾지 않는다. 단순한 문화예술 공간만이 아닌, 예술가를 품은 공간, 학생들을 가르치는 공간, 때론 상업시설과 함께하는 공간이 돼야 한다. 제대로 된 선순환 구조가 마련되면, 폐산업시설은 그야말로 ‘제대로’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김기중
김기중
서울신문 기자. 좀 더 나은 미래를 만들고 싶어 기자가 됐다. 재밌는 기사, 정보가 되는 기사를 쓰려고 노력 중이다. 주력 분야는 문화와 교육. 좋아하는 분야도 문화와 교육.
gjkim@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