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다란 창고의 나무문을 밀면 유리 너머 흡사 작은 박물관에 들어온 것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묵직한 잉크 냄새 사이로 인쇄기계들과 활자들, 각종 도구들이 가득하고, 그 너머 한켠엔 천장까지 책들이 빼곡하다. 이곳은 완주군 삼례읍 옛 농협창고를 개조한 삼례문화예술촌에 문을 연 ‘책공방북아트센터’다. 이 오래된 공간은 주인장 김진섭 책공방북아트센터 대표를 쏙 닮았다. 개인의 취향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오래된 컬렉션들에 숨을 불어넣고 있는 주인장의 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었다. 이곳을 채운 많은 물건들만큼 쌓인 시간을, 사람들을, 이야기를 조금만 꺼내 본다.

삼례문화예술촌에 책공방북아트센터가 문을 연 지 벌써 6년째에 접어들었다. 이곳은 어떤 곳인가?
책공방북아트센터(이하 책공방)를 어떤 곳이라고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굉장히 어렵다. 책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고 싶은 복합공간이다. 처음 서울에서 책공방을 시작할 땐 ‘책공방은 이런 곳이다’라는 정의를 했었는데, 삼례에 내려와서는 고민을 했다. 이곳에서 화두로 잡은 것은 지역 콘텐츠이다. 완주의 이야기, 완주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수많은 콘텐츠를 기록하고, 책으로 만들어서 출판하고, 여기 삼례의 서점에서 유통하는 A부터 Z까지의 모든 과정을 여기에서 다 하고 싶었다. 우리는 삼례를, 삼례 사람들을, 그들의 이야기를 아카이빙 한다. 그래서 책을 ‘만든다’고 하기 보단 ‘짓는다’고 말한다.

100년 된 공간이 풍기는 아우라가 예사롭지 않다. 오래된 것에 대한 가치, 손으로 만드는 것에 대한 존중, 이런 요소들을 지켜가는 것이 쉽지 않을 것 같다. 우연히 인연이 닿았다는 이곳 삼례에서 꿈을 이루고 있으신지 궁금하다.
삼례에 내려오기 전 오랫동안 책과 관련된 일을 해오면서 신사동 가로수길, 홍대 등 문화 중심지에 머무르며 늘 문화를 이야기하고 싶었다. 내 인생에 처음 안식년을 거치며 삼례에서 문화를 가지고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 내가 있는 곳을 문화 중심지로 만들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내가 그동안 수집해온 책 기계와 책 관련 모든 물건을 가지고 내려오게 되었다. 내려오면서 두 가지 목표를 세웠다.
첫 번째 목표는 사람을 키우는 것이다. 책을 만드는데 필요한 기술과 관련 직업군은 열 가지 이상이다. 독일의 마인츠, 라이프치히의 오래된 공방에서 도제로 배우는 청년들이 역사를 이어가듯이 이곳 책공방에서도 기술을 전수하고, 관련 전문가 양성을 준비하고 있다. 옛 활판 방식으로 인쇄를 하는 장인들에게 배울 수 있는 시간은 이제 길어야 10년 남짓이다. 배우고 싶어도 가르칠 사람이 없다. 30년 동안 모아 온 인쇄 기계들을 가만히 전시만 하는 것은 구슬을 꿰지 않고 늘어놓기만 하는 것과 같다. 갈 길은 멀고 마음이 바쁘다. 완주군과 함께 책공방 청년인턴 제도를 해보면 어떨까 상상도 해본다. 책공방을 거쳐 간 많은 청년이 완주에서 특별한 콘텐츠를 생산하고, 재미있는 공간을 만들어 간다면 완주는 진정한 문화도시로 거듭나지 않을까.
두 번째는 책공방의 일상을 기록하는 일이다. 책공방이 삼례에 자리 잡으면서 이곳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이야기를 매일매일 기록한다. 오늘의 그 감정 그대로 사그라들기 전에 기록한다. 유난히 치열한 하루였다면 할 말이 더 많다. 제자 이승희와 함께 책공방 15주년을 기념해 책으로 엮은 결과물은 제23회 한국출판평론상 우수상에 선정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지역에서 자리 잡고 있는 문화공간에서 만들어졌다는 의미가 더 특별하다. 매일매일 물을 주고, 풀을 뽑고, 살피는 농부의 심정으로 지금도 날마다 오늘을 기록하고 있다.

책공방북아트센터
농부의 마음으로 매일매일 켜켜이 쌓인 기록물은 이 공간의 특별한 역사로 남을 것 같다. 책공방에서 진행하고 있는 ‘책학교’에서는 지역 콘텐츠로 자신만의 이야기를 담아 책을 만드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소소하지만 특별한 이 기록물에 대한 이야기를 부탁한다.
이제 더 이상 책 쓰는 사람이 대단한 사람이어야 하지도 않고, 책을 만드는 것이 어려운 일도 아니다. 누구나 다 쓸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책을 쓰는 일은 참 어렵다. 이곳에도 스스로 책을 쓴다는 것을 상상도 못 했던 이들이 책을 한 번 써봤으면 하는 로망을 안고 찾아온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내 콘텐츠를 기록으로 남기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책은 요리와 비슷하다. 처음 만든 요리가 그렇듯 첫 책은 다만 맛이 없을 뿐이다. 이걸 인정하면 책을 잘 써야 한다는 두려움을 내려놓을 수 있다. 사진을 찍어서 기록할 수도 있고, 일상 속 영수증을 모아 책을 만들 수도 있다. 실제로 책학교 졸업생들은 ‘소양면으로 귀농해 살아온 이야기’ ‘주변의 사라져 가는 간판 사진’ ‘완주군 SNS 활동 내용’ ‘카멜레온을 주제로 한 동화’ 등 소소한 주제를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했다. 책의 고정관념을 깰수록 좋은 책을 만들 수 있다.
이제는 독립출판의 시대이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표현하고 싶은 이야기 등 책 내용에 한계가 사라졌다. 물론 잘 팔리는 책은 예외다. 여기서 더 나아가 자유출판시장을 주장한다. 나 역시 삼례에서 1년 1책 프로젝트에 도전하고 있다. 매년 쓰고, 생각하고, 디자인하고, 답사하고, 내년엔 뭘 할지 고민하고 있다. 마치 농사짓는 농부의 노동처럼 몸으로 일하고 있다. 물론 가끔 흉년도 있다.
100년의 역사가 있는 이 공간에서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지역의 이야기를, 개인의 이야기를 꿋꿋하게 담는 작업을 계속 해왔다. 미래세대에게 손으로 자기 것을 만들 수 있는 독특한 문화를 심어주고 싶었던 생각이 인쇄술과 책으로 구현되는 듯하다. 책학교를 6기까지 진행하면서 인상 깊은 참가자나 에피소드가 있다면?
어쩌다 시골로 시집와서, 책은 잘 모르지만 책 한 권 만들어보는 로망이 있었던 한 친구가 생각난다. 김제에서 삼례까지 기차로 오갔던 책학교 수업 한 순간 한 순간이 눈물이고 감동이라고 말했다. 어떤 책을 만들어야 할지 몰라 고민을 하기에 “주부로서의 삶이 너무 바빠 글 쓰는 것이 힘드니 카메라 하나 들고 나가 완주라는 올드(old) 도시의 간판을 찍어 보는 건 어떻겠냐.”고 권했다. 이런 것도 책이 되느냐는 물음에 꼭 글자가 있어야만 책은 아니라고 대답했다. 커다란 DSLR 카메라를 덜컥 사서 삼례 구석구석을 다니더라. 물론 카메라도 처음이라 DSLR은 다루기가 어려워서 결국 똑딱이 카메라와 핸드폰으로 찍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렇게 나온 책이 주변의 사라져 가는 간판 사진을 모은 책 『시골 가게』이다. 세련된 것들보다 이렇게 투박하고, 촌스러운 것들의 기록이 자료로서의 매력도가 더 크다. 책학교 1, 2기 수료생들이 만든 ‘북메리카노’라는 독서동아리도 있다. 매달 완주에서 책 읽기 좋은 숨겨진 명소를 소개하며 모여서 책을 읽고 생각을 나누는 ‘완주 동네 BOOK’을 진행하고 있다. 8월에는 상관면 편백나무 숲에서 진행하는데, 이들의 작당모의도 기대가 된다.

책학교
작가가 만들었다고 해도 믿을 만큼 놀라운 사진집이다. 이런 간판은 도시정책으로 점차 사라져 가고 있기에 완주의 기록사적인 측면으로도 매우 의미가 있다. 이러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완주에서 꿈꾸는 미래는 무엇인가?
나는 삼례가 좋다. 삼례는 늘 새로운 시도를 한다. 이곳에서 삼례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삼례의 서점에서 판매하고, 아카이빙을 하는 도서관을 운영하며, 이 동네에 사는 저자들이 책방을 지키고, 판매도 하는 재밌는 궁리를 하고 있다. 세련된 아카이빙이 아니라 한 장 한 장 탑을 쌓듯이 투박하지만 오랜 시간의 힘을 필요로 하는 공간을 차근차근 만들어 가고 있다. 베스트셀러를 꽂아 놓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으니 삼례는 좀 더 특별한 것을 해보고 싶다. 이런 게 진정한 책의 도시가 아닐까. 소박한 꿈이 있다면 30명만 와도 꽉 차는 이 공간에 작은 여유가 생기는 것이다. 책공방에서 ‘공방 콘서트’라는 이름으로 음악회를 10회 정도 진행했다. 삼례에서 공연을 보려면 최소한 전주쯤 나가야 하는데, 이곳에서는 100년 된 공간의 울림통을 통해 코앞에서 연주자들의 무대를 만날 수 있다. 아이들의 놀이터로, 음악회를 하는 공연장으로, 때로는 영화관으로, 맛있는 음식과 함께하는 지역의 복합문화공간으로서 역할을 지속적으로 해나가고 싶다.

자서전 학교
‘지역’이라는 용어는 쓰고 싶지 않지만, 여기는 농촌이고, 변두리의 또 변두리다. 이곳 책공방에서는 아주 작고, 미시적인, 남들에게는 잘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는 이야기들을 기록하고, 책이라는 형태를 통해 지역의 콘텐츠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 소소한 이야기를 매일같이 쌓아가며 5년 동안 지역에서 책공방이 꿈틀거릴 수 있는 힘은 이 지역성과 장소성이 아닐까.
김진섭

김진섭

2013년 지금까지 수집했던 책과 인쇄관련 근현대 수집품과 함께 삼례로 이주해 삼례문화예술촌에 책공방북아트센터를 열고 ‘완주 자서전학교’ ‘책학교’ 등 주민들과 함께 완주의 이야기를 수집하고 책으로 출판하는 일을 하고 있다. 저서로는 『BOOK TOOLS』 『LETTER PRESS TOOLS』 『한국레터프레스100년 인쇄도감』 『책 만드는 버스』 『책 잘 만드는 제책』 『책 잘 만드는 책』 등이 있다.
책공방 페이스북 www.facebook.com/bookbus.co.kr
영상_박영균(영상작가)
사진제공_책공방북아트센터
장시형
장시형
완주문화재단 예술진흥팀장. 얼떨결에 시작한 시골살이에 매력을 느끼며, 그림공부와 박물관 근무경력을 살려 동네잡화점 주인을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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