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도쿄의 모리미술관과 국립신미술관에서 아세안(ASEAN) 창립 50주년 기념으로 열린 《선샤워: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의 동남아시아 동시대 미술전》 전시를 볼 기회가 있었다. 그중 몇 섹션에서 이들 지역에서 벌어지는 커뮤니티 교육에 대한 프로젝트가 눈에 띄었다. 신보슬 토탈미술관 큐레이터와의 인터뷰를 요청받았을 때, 이 전시가 떠올랐다. 동남아시아 지역과 연계된 교육 프로젝트와 그에 관련된 전시 말이다. 그러나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그가 진행하는 프로젝트가 처음 내가 생각한 것과는 꽤 다른 지점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겠다. 미술, 전시라는 카테고리를 넘어 교육, 사회,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양한 프로젝트 속에서 예술과 교육이 가지고 있는 힘에 대해 치열한 고민을 하고 있는 신보슬 큐레이터를 만났다.

말레이시아에서 시작된 문화예술교육
“토탈미술관에서 11년째 전시기획을 하고 있습니다. 그전에는 대안공간, 서울시립미술관 등 여러 기관에서 다양한 동시대 미술에 관련해서 기획했고요. 토탈미술관에서도 물론 이러한 전시를 계속 진행하고 있어요. 기존의 전시 기획과는 다른, 지금 진행하고 있는 여러 문화예술교육 프로젝트는 몇 가지 요소가 결합되어 시작하게 되었어요. 토탈미술관으로 오면서 기획에 대한 자율성이 높아졌고, 좀 더 확장된 개념의 기획, 사람과 사람, 사람과 공간을 연결할 수 있는 기획이 가능하게 되었죠. 하지만, 제일 큰 이유는 제 개인적인 고민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민해 봤을 법하다. 오랫동안 자신의 일을 하면서 느끼는 슬럼프를. 신 큐레이터 또한 오랫동안 미술계에 종사하면서 점점 더 몸과 마음이 힘들어지는, 이른바 ‘슬럼프’에 빠진 것이다. 좀 더 즉각적이고 직접적으로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주변의 작가들도 동감하고 곧바로 의기투합했다.
“미술계에서 일하면서 자긍심을 얻고 싶었다고 할까요? 제일 먼저 ‘로드쇼(Roadshow)’라는 프로젝트를 기획했어요. 2011년이었죠. 처음에는 여러 예술가와 기획자가 함께 여행을 하면서 어떤 생각을 하는지, 무슨 고민을 하는지 허심탄회하게 공유를 해보려는, 반쯤 장난스런 프로젝트였어요. 체계적은 아니었죠. 그런데 해보니, 꽤 큰 파급력이 있었어요. 서로 여행하면서 고생하고 마음을 공유하고, 여행 지역에서 여러 프로젝트도 진행하면서 의견도 나누고 피드백도 받고… 큰 힘을 얻었던 거죠. 사실 이 프로젝트를 얼마나 지속할지 몰랐는데, 지금도 진행하고 있네요.”

문화예술교육도 비슷한 고민에서 시작된다. 미술관은 전시를 통해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플랫폼이다. 그런데 ‘전시’라는 플랫폼은 즉각적인 피드백을 얻기가 힘들다. 좀 더 직접적인 소통을 꾀하는 과정에서 문화예술교육의 아이디어가 등장했다.
“가족이 말레이시아에 있어요. 사실 동남아시아 쪽에는 미술에 대한 전문 큐레이터가 거의 없어요. 전시도 거의 안 열리죠. 작가도 별로 없고요. 미술관이 사람을 만나고 전시가 열리는 플랫폼이라고 한다면, 동남아시아 미술계 상황은 별로 좋지 않다고 봐야 해요. 이런 상황에서 말레이시아 코타키나발루에 갔어요. 리조트 지역이라 페스티벌이 많이 열려요. 여기서 미디어아트 페스티벌을 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일할 사람이 없더라고요.”
이러한 상황에서 신 큐레이터는 아예 이곳에서 예술 페스티벌을 진행할 수 있는 사람을 양성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른바 첫 문화예술교육 프로젝트의 시작이었다. 워크숍을 열었다. 국내 작가, 기획자들이 참여했다. 5년 정도를 진행했을 때, 왜 굳이 이들과 ‘미디어아트 페스티벌을 해야 할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방향을 틀었다.
“워크숍은 잘 진행되었어요. 그런데 워크숍을 듣던 친구들이 좀 더 자기들의 삶 속에 들어오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를 원했어요. 참여자 중 한 명이 인도네시아 사람이었는데, 그가 ‘바틱(Batik)’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바틱은 적도 이남의 동남아시아 국가들에서는 흔한, 전통 방식의 염색 기법이에요. 특히 인도네시아가 메인 바틱 지역이지요. 이러한 역사가 깊고 전통 있는 기술을 좀 더 발전시키고 싶다는 것이었어요.”
전통 바틱의 미래 만들기
바틱은 수공으로 염색하는 인도네시아 전통 기법이자 상징이고 문화다. 먼저 천연 옷감에 밀랍으로 그림을 그리고 천을 천연염료에 담가 염색을 한다. 다음에 뜨거운 물로 밀랍을 제거하면 전통 문양과 천연 염색이 어우러진 멋진 천이 만들어진다.
“문제는 이러한 바틱이 전통에만 머물러 있어, 젊은 사람들에게 어필을 못하고 도움이 되지 못하는 상황이었어요. 단순한 전통 문양으로 저가의 관광 기념품 정도로 제작이 되니까, 바틱으로 생계도 쉽지 않았고요. 젊은 사람들은 관광지의 호텔이나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것이 훨씬 벌이가 좋으니 바틱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거지요.”
재료를 생산하고 단순히 제작만 하는, 이른바 전통 오가닉 제품이라는 부가가치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던 상황에서 신 큐레이터는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의 지원으로 이 바틱 프로젝트를 공적개발원조(Official Development Assistance, ODA) 형태로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2016년부터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과 <평창문화올림픽 ODA> 사업 일환으로 ‘바틱 스토리(Batik Story)’(관련기사: 자바섬 작은 마을의 바틱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인도네시아 파수루안 지역에서 진행했습니다. 바틱 선생님의 고향이었어요. 이곳에 위치한 알람바틱센터와 토탈미술관이 공동으로 프로젝트를 시작했어요. 시각, 가구, 사진, 영상 분야의 작가들과 잡지 에디터 등 다양한 분야의 국내 전문가가 참여했습니다. 알람바틱센터에 10대부터 3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 모였는데, 사실 처음에는 학생들이 공부하러 오는 것이 아니었어요. 어려운 생활 속에서 센터의 식당에 밥을 먹으러 오더군요. 바틱의 역사나 문양의 의미를 전혀 알지 못했어요.”
그러나 점차 학생들도 바틱에 관심을 드러냈고, 역사와 제작기법 등에 대해 공부를 시작했다. 다양한 방식의 문화예술교육으로 바틱에 대해 접근하자 학생들도 적극적으로 변했고, 이제는 이곳을 ‘바틱 빌리지’로 키우고, 10월에 있을 ‘인도네시아 내셔널 바틱데이’에 페스티벌을 기획하기에 이르렀다.
“이제는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바틱에 대해 공부하고 이를 자신들만의 프로젝트로 만들고 있어요. SNS를 통해서 자신들이 만든 기획과 바틱 작품을 서로 교류하고 내용에 대해 소통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파수루안에서 치르본으로 장소를 옮겨 7월부터 12월까지 ‘2018 문화예술교육 ODA’로 ‘인도네시아 바틱스토리: 치르본’을 기획, 진행한다. 치르본에서의 프로젝트는 지역 여성, 아이들과 함께 문화예술 워크숍과 바틱을 연계한 프로그램을 운영할 계획이다. 지역 환경 개선과 자존감을 높이고자 기획된 프로그램은 미디에이터(mediator, 중재자) 교육을 통해 파견된 한국 작가와 교사가 귀국한 이후에도 사업이 지속될 수 있도록 플랫폼을 마련하고, 워크숍 결과물로 제작된 작품의 유통을 위한 기반 조성까지를 계획하고 있다.
“’바틱 스토리’에 대한 큰 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바틱 브랜드화를 꾀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전통 문양을 그려내는 바틱이 아니라, 좀 더 현대적이고 제작자의 창의성이 개입되는 바틱을 만들어 이를 브랜드화 하는 거죠. 다양한 바틱 상품을 만들어 내려고 기획하고 있습니다. 우리 예술가들과 현지 바틱 작가들이 함께함으로써, 문화예술교육을 통해 단순히 가르쳐준다는 개념이 아니라 상호보완을 하는 거죠. 이를 통해 자생성을 기르고, 자생성이 확보되면 계속 지속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문화예술교육 프로젝트의 의미가 커질 수 있겠지요.”

예술교육, 연결하고 확장하기
신 큐레이터가 진행하는 문화예술교육 프로젝트는 국제적인 ‘바틱 스토리’ 외에도 국내에서 중구청과 토탈미술관이 협력해 진행하는 ‘드림 블라썸 아카데미’와 순천의 외서초등학교와 함께 진행하는 ‘방과후 큐레이팅’으로 확대되었다. 처음 말레이시아에서 시작한 작은 교육 프로젝트가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어진 것이다.
“‘드림 블라썸 아카데미’는 중구 장애인복지관의 자문을 맡고 있던 SK 사회공헌팀과 연결되면서 시작되었어요. 우리 프로젝트를 알고 있던 SK 사회공헌팀이 중구청에 소개했고, 2017년부터 함께 하게 된 것이지요. 자폐아와 발달장애아들에 대한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을 기획했어요. 개인적으로 부담감이 있었지만, 28주간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너무나 많은 변화를 보고 놀랐습니다. 이들은 고정관념이라는 게 없어요. 완전히 새로운 미감을 창조해내고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도 달라지더군요. 올해부터 말레이시아의 코타키나발루의 차일드 사바 기관과 협력해 이들이 직접 해외를 찾을 예정입니다. 순천의 외서초등학교와 진행하는 ‘방과후 큐레이팅’은 ‘로드쇼: 포항에서 여수까지’ 프로젝트 와중에 연결이 되었어요. 전교생이 40명밖에 안 되는데, 그 중 5학년 학생들 7명을 대상으로 큐레이팅 과정을 교육했어요.”
소박하게 시작되었지만, 아이들의 ‘방과후 큐레이팅’에 대한 열정은 본격적으로 순천예술회관을 대관해 전시를 기획, 전시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실제 큐레이팅 과정과 똑같은 방식으로 학생들은 글을 쓰고,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고, 벽글(월 텍스트) 작업을 해냈다. 전시 개막일에는 테이프 커팅과 축하공연까지 진행될 정도로 본격적이었다고 할까.
“’드림 블라썸 아카데미’와 ‘방과 후 큐레이팅’을 진행하면서 많은 것을 느꼈어요. ‘드림 블라썸 아카데미’의 경우, 짧은 시간에 이루어진 참여자들의 변화에 복지관 측도 놀라더라고요. 부모님은 발표 작품을 보고 감격해서 우는 경우도 있었어요. ‘방과 후 큐레이팅’은 아이들이 직접 큐레이팅 과정을 진행하면서, 자연적으로 뮤지엄 에티켓을 기를 수 있더라고요. 전시 서문을 쓰면서 글쓰기와 디스플레이를 하면서 전시와 작품을 보는 맥락을 고민하기도 하고, 여러 명이 협업을 하는 과정까지 종합적인 통합 교육이 이루어졌다고 할까요? 일종의 보람이라고 할지, 저도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만나는 방식, 그리고 지속가능한 자생성
신 큐레이터에게 ‘바틱 스토리’ ‘드림 블라썸 아카데미’ ‘방과 후 큐레이팅’ 등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느낀 의미와 과제가 궁금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전시는 즉각적인 피드백을 얻기가 어려워요. 문화예술교육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즉각적인 피드백을 얻었던 것이 좋았습니다. 예술가가 ‘세상에서 필요한 일을 하고 있구나’ 하는 용기를 얻었던 것 같아요. 또 직접적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부딪치는 문화예술교육 프로젝트는 전시와 달리, 아예 예술계에서의 접근과는 달리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좀 더 나아가서 ‘바틱 스토리’처럼, 프로젝트를 브랜드화하고 지속가능하고 자생성을 키울 수 있는 방향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인터뷰를 마칠 즈음, 신 큐레이터가 잠시 말을 멈추고 사무실에서 물건을 하나 들고 왔다. 소박하지만 예쁜 갈색과 강렬한 붉은 색의 바틱 소품들이다. 갈색의 커다란 보자기와 붉은색 목도리다. 천연 염색 방식으로 제작된 갈색과 붉은 색은 의외로 선명하다. 여기에 교육을 받은 학생들이 자신만의 아이디어로 구상한 그림, 문양들이 그려져 있었다. 보자기에는 바틱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는 자기 마을에 대한 그림지도가 아기자기하게 그려져 있다. ‘어디에는 이런 나무가 있고, 건물이 있고, 길이 있고…’ 눈으로 그림을 좇아가면서 그들의 꿈을 좇는다. 이렇게 예술과 교육이 만났다. 이 예술과 교육은 단순히 프로젝트와 전시 등 예술계의 지형도 속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큰 ‘빅 픽처’ 속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삶과 예술의 조화, 자생성과 지속성이 이 큰 그림 속에 있다. 좇기에 버거울 정도로 크고 아름답게 말이다.

  • 챈팅(Tjanting)
  • 바틱 잡지
  • 바틱 마을지도
신보슬

신보슬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학과 석사, 동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97년부터 전시기획을 시작해, 2000년부터 2002년까지 아트센터 나비에서 큐레이터로 활동하며 미디어아트 분야의 전문성을 띤 큐레이터로 활동을 시작했다. 서울국제미디어아트비엔날레(미디어시티서울) 전시팀장, 의정부디지털아트페스티벌 큐레이터, 대안공간 루프 책임큐레이터 등을 역임했으며, 2005년 독일 베를린 <트렌스미디알레(transmediale)>, 런던 골드스미스 <창조적 진화(Creative Evolution)>, 인도 델리 제1회 CeC&CaC 등 국내외 미디어아트 관련 학술행사 및 전시 등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현재 중앙대학교 대학원 겸임교수이자 토탈미술관 큐레이터로 재직하며 미디어아트뿐만 아니라 현대미술 전방위로 활동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https://blog.naver.com/boseulshin
영상_박영균(영상작가)
프로젝트 사진 제공 _ 토탈미술관
류동현
류동현
서울대학교에서 인문대학 고고미술사학과를 졸업했다. 미술전문지 [아트](현 아트인 컬쳐), [월간미술] 기자로 일했으며, 문화역서울 284 전시큐레이터를 역임했다. 『미술이 온다』(오픈하우스, 2015), 『런던-기억』(책읽는 수요일, 2014) 등의 저서가 있다. 전시 <프로젝트284: 시간여행자의 시계>(문화역서울 284, 2017), 《페스티벌284: 美親狂場》(문화역서울 284, 2015) 등을 기획했으며, 개인전 《미술기자 Y씨의 뽕빨 111번》(워크룸, 2009)을 열었다. 현재 미술 저널리스트 겸 전시기획자, [페도라프레스] 편집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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