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 산업혁명과 공연예술’이라는 주제의 원고 청탁을 받았다. 이노베이터에게 어울리는 주제다. 그러나 필자는 이노베이터가 아니다. 게다가 도래하지도 않은 미래 세계에 대한 예측이라니. 그렇다면 필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지금 이 시점에서 최전선에 있는 예술을 소개하는 일뿐이다.
지금 여기, 시공간의 파괴
시작은 익숙한 것으로 하자. 먼저 소개할 공연은 영국 국립극장의 ‘NT 라이브(NT Live)’ ‘내셔널 시어터 라이브(National Theatre Live)’의 약자로, 영국 국립극장에서는 2009년 헬렌 미렌 주연의 연극 <페드라>를 시작으로 NT 라이브를 진행하고 있다. 가장 유명한 프로그램으로는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주연한 <햄릿>과 <프랑켄슈타인>이 있다. 한국에서는 국립극장에서 2014년부터 NT 라이브 녹화영상을 상영 중이다. 최근에는 이브 반 호프 연출의 <강박관념>과 <헤다 가블러>를 상영한 바 있다.
사실 녹화영상을 상영하는 게, 그리 새로운 사건은 아니다. 그러나 유럽으로 시선을 돌리면 그것이 색다른 시도임을 알 수 있다. 영국과 시차가 없는 유럽에서는 공연을 실시간 생방송으로 관람할 수 있다. NT 라이브는 현재 영국 전역을 포함해 전 세계 46개국에서 상영되고 있다. (생중계를 볼 수 있다면) 지구 반대편의 뉴질랜드에서도 영국 관객과 같은 시간에 같은 체험을 할 수 있는 셈이다. 이는 공연예술의 태생적 한계인 ‘지금 여기’의 시간적 공간적 경계를 파괴하는 시도이다.


  • NT 라이브 <햄릿> 트레일러 영상
관객, 군중과 개인 사이
NT 라이브가 제레미 벤담 식의 공리주의,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의 구현이라면, 이제부터 소개할 공연은 그 정반대편에 위치해있다. 지난해 서울 남산예술센터에서 선보였던 <천사-유보된 제목>은 회당 한 사람의 관객만 관람할 수 있는 연극이었다. 공연은 관객이 VR 헤드셋을 착용하는 것으로 시작해 VR 헤드셋을 벗는 것으로 끝난다. 관객을 인도하는 이는 한 명으로, 그가 곧 안내자이자 이 공연의 유일한 배우이다. 관객은 그의 안내에 따라 분장실과 소품실 등 60분 동안 백스테이지 투어를 함께한다. 사실 공연을 여닫는 장면에서 VR 헤드셋을 착용하는 점을 제외하면, 공연은 오히려 더 원초적이다. 이렇다 할 무대나 조명, 음악이나 음향효과도 없다. 오롯이 배우와 관객, 단 둘의 교감만이 있을 뿐이다. 대항 공연은 연극이라는 예술에 대해 재고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군중으로서의 관객이 아닌 개인으로서의 관객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주었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천사-유보된 제목>
사진_ 이강물 ©남산예술센터
로봇, 인간을 대신하여 인간을 위로하다
4차 산업혁명의 핵심 중 하나로 로봇공학이 있다는 점에서는, 로봇이 출연한 공연을 언급할 수 있을 듯싶다. 일본의 작가 겸 연출가 히라타 오리자의 <사요나라>다. 히라타 오리자는 조용한 연극으로 국내에도 작은 파문을 일으켰던 작가로, 지금은 일본을 대표해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고 있다. 그가 2010년 초연한 <사요나라>는 인간과 닮은 로봇이 사람과 대등한 역으로 출연하는 2인극(?)이다.
인간과 로봇의 대립이라는 진부한 구도설정은 없다. 주인공 ‘안드로이드 제미노이드 F’는 인간에게 시를 읽어주는 반려로봇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제미노이드 F는 원자력사고로 인간은 접근할 수 없는 후쿠시마 원전에서 인간을 대신하여 죽은 영혼을 달래는 역할을 부여받는다. 캐릭터와 서사 모두 흥미로우나, 역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안드로이드 제미노이드 F일 것이다. 완벽하게 닮지는 않았지만, 인간과 거의 흡사한 외모라, 공연장의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는 그것이 로봇인지 인간인지 언뜻 보아서는 구분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이 작품은 2016년 코지 후카다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기도 했다.

마법, 내 책상 위에서 부활한 전설
마지막으로 언급할 공연은, 현재의 기술 수준으로는 최첨단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홀로그램을 동원한 공연이다. 먼저 소개할 공연은 2014년 미국 빌보드 시상식이다. 여기서 마이클 잭슨은 16명의 댄서들과 함께 5인조 밴드의 음악에 맞춰 ‘슬레이브 투 더 리듬(Slave To The Rhythm)’을 공연했다. 먼저 시상식 공연 영상부터 보시라. 마이클 잭슨과 댄서들 사이에 아무런 위화감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영상 속 마이클 잭슨은 홀로그램을 통해 부활한 환영이다. 제작 영상에서는 마이클 잭슨과 합을 맞추기 위해 댄서들과 프로그래머들이 어떤 준비과정을 거쳤는지 확인할 수 있다.

국내에서도 이와 유사한 프로젝트가 진행되었다. KB증권이 밴드 국카스텐과 함께했던 캠페인성 광고다. 첫 번째 영상에서는 국카스텐 공연을 홀로그램으로 촬영한 영상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보이고픈 영상은 따로 있다. 뒤이어 링크한 영상이다. 첫 번째 영상이 홀로그램 공연 영상이라면, 두 번째 영상은 이를 스마트폰으로 재생하는데 필요한 홀로그램 키트(kit)를 증정하는 이벤트를 홍보하는 영상이다. 현재 발전한 기술력 덕에 개인의 미디어(플랫폼)로도 홀로그램 영상을 볼 수 있다.

  • KB증권 국카스텐 홀로그램 공연
  • 스마트폰용 홀로그램 키트 홍보 영상
“당신의 경쟁상대는 옆에 있는 동료들이 아니에요. 당신의 경쟁상대는 모바일이에요.”
공연기획자를 대상으로 강의를 할 때 가끔 하는 말이다. 물론, 해외 오케스트라의 내한공연이나 대형 라이선스 뮤지컬 공연의 경우, 동종업계의 일정에 촉각을 세우는 건 여전하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요즘 사람들은 모바일에서 게임을 즐기고, ‘짤방’을 보고, SNS에 접속한다. 공연보다 시공간적 접근성이 강한 영화도 모바일에 자리를 내어주는 판이다. 아주 먼 미래에도 지금의 극장들은 아날로그를 선호하는 이들에 의해 유지ㆍ존속될 것이다. 그러나 딱딱한 극장 좌석이 아닌 푹신한 소파에서, 침대에서 공연을 보는 이들이 보다 늘어날 것이다. 공연기획자가 모바일과 경쟁해야 하는 세상은 먼 미래의 일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도래한 미래다.
김일송
김일송
칼럼니스트이자 이안재 대표소사이다. 공연문화월간지 [씬플레이빌]과 서울무용센터 웹진 [춤:in] 편집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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