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럼에 참석하기 전, 무슨 주제로 어떤 사람들이 모이는 지 살펴봤다. ‘문화예술교육, 체험에서 경험으로’라는 제목을 들으니 설명할 수 없지만 느낌이 왔다. ‘타율에서 자율로’, ‘떠먹여주는 밥 말고 지어먹는 밥으로’라고 비유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어쩌면 오래 전부터 해왔던 이야기, 아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다음으론 어떤 분들이 이야기하는지 이름을 훑었다. 어라, 거의 아는 분들이다. 학교 스승, 직장 상사, 선배, 예술가, 기획자들. 20대 후반부터 내가 문화예술교육을 접하고 그걸로 밥벌이를 할 수 있게 앞뒤로 도와주고 좌우로 자극을 주었던 분들이다. 한 장짜리 포럼 시간표를 찬찬히 들여다보니 시공간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광주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직원으로 생활했던 그 때가 불현듯 떠올랐다. 7년을 그곳에서 일했고, 5년을 ‘지역특성화 문화예술교육 지원사업’ 담당자로 궁둥이를 붙였었다. 나는 문화예술교육 종사자였다.

  • 북구문화의집 하면 떠오르는 따뜻한 녹색 방에서 열린 포럼 현장
12월 13일 광주 ‘북구문화의집’에서 「2017 창의예술학교 ‘아뜨르릉 배움학교’ 배움포럼」이 열렸다. 주제는 <문화예술교육, 체험에서 경험으로>. 광주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에서 6년째 하고 있는 ‘창의예술학교’가 연 포럼이기에 이 학교부터 잠깐 짚어보겠다. 창의예술학교는 2012년 4월 28일에 문을 열었다. 이 학교의 첫 해를 기억한다. 길이 아니면 가지 말아야하는 정형화된 지원사업 담당자였던 내가 보기엔 창의예술학교는 ‘진보’였다. 내 코가 석 자라 자세히 들여다보지 못했지만 이 학교는 유별났다. 계획안만 봐도 학교가 추구하는 가치를 설명하는 데 굉장히 공을 들였고 쓰는 단어도 좀 달랐다. 교육청을 떠올리게 하지만 느낌은 다른 ‘배움청’이라는 개념도 있었다. 학교의 설립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정말 자주 만났다. 도대체 언제 시작하려고 저렇게 뜸을 들이나 주위에선 걱정했지만 그들은 설레고 즐거워보였다. 작고도 큰 프로젝트였다.
2015년이었나. 육아휴직 후 돌아와 보니 창의예술학교는 가출 후 돌아온, 싹둑 단발머리에 단정히 교복을 입은 아이가 되어있었다. 여타 지원사업과 다를 게 없었다. 창의예술학교는 생기를 잃었다. 내가 보기엔 그랬다. 창의예술학교 소개 글을 일부 옮겨본다.
2017 창의예술학교
2017 창의예술학교 <바퀴달린학교>, <오디세이예술학교>, <재미마중노리학교>, <시가 들리고 음표가 읽히는 예술학교> 4개 학교는 …… 초등학생부터 어르신까지 창의적 문화경험의 기회를 제공하고자 2012년부터 6년째 (재)광주문화재단 광주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지원사업으로 운영되고 있다. 삶 속의 다양한 문화예술과 지역이 가진 고유의 문화자원(인적, 물적, 공간, 정신)과의 관계를 통해 창조적 지성을 발견하고, 이를 실천으로 풀어나가는 ‘삶의 경험학교’이다.
올해 창의예술학교는 어땠을까. 그 기승전결은 알 수 없으나 이젠 제발 ‘체험’에서 ‘경험’으로 넘어가자고 한 목소리를 내려는 간절함은 짐작할 수 있었다. 이제 형식과 성과엔 그만 집착하고, 내용과 과정에 마음을 쏟자고 말이다.
북구문화의집에 도착해 반가운 분들과 인사를 나눴다. 순식간에 체온이 올라간다. 대부분, 서로 족히 십 년은 알고 지낸 분들일 테다. 모두 일곱 명이, 각각 십 분에서 이십 분 정도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바탕으로 문화예술교육이 ‘경험으로서의 예술’이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지혜를 구하는 마음으로 자리에 섰다며 정경운 교수가 사회를 맡았고, 한겨울 평일 오후에, 즉 웬만하면 집에 있고 싶은 시간에 신기하게도 삼십 여명이 찾아왔다. 그들은 학부모, 대안교육 및 진로교육 관계자, 지역문화재단 관계자 등이었다.

  • 학부모, 대안교육 및 진로교육 관계자,
    지역문화재단 관계자 등 삼십 여명이 모였다.
  • 수많은 이야기들을 하나로 꿰어준
    사회자 정경운 교수(전남대학교 문화전문대학원)
기억에 남는 한 마디를 꼽고, 일곱 명의 이야기를 추려 본다.
“기능을 가르치기보다 경험을 나누려 했어요.”
‘내마음은 콩밭’ 단체를 둘러보기에 이십 분은 정말 짧았다. 서민정 대표가 2012년부터 일구었던 ‘내마음은 콩밭’은 대구 경북대학교 서문(西門) 근처에 있다. 단체가 세워진 첫 해엔 문화기획, 디자인, 언론, 미술, 공정여행, IT 등을 전공한 이들이 밤마다 만나 자신이 가꾸고 싶은 콩밭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일본 시부야 대학 학장을 초청해 ‘마을은 대학이다’라는 포럼도 열었고, 이듬해 서문에 공간을 마련해 주민들과 상견례를 했다. 그 해부터 매해 서문 축제를 열고 있고 단체 이름으로 협동조합도 만들었다.
깜짝 반가웠다. 나는 스무 살이었던 2000년에 경북대학교에서 일년 간 교환학생으로 지냈다. 서문 레코드 가게에서 순전히 주인아저씨의 추천으로 샀던 ‘나카무라 유리코’의 앨범이 순간 떠올랐다. 잠시 멍하다 다시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문제집 뒤편에 있던 풀이과정조차 외워버렸던 학생 때를 떠올리며 나와 친구들이 정말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 것을 묻기 시작했다.
여행 그림책을 만들고, 흑백 사진을 찍고, 거리 축제를 진행하고 싶은 이들이 콩밭학교의 ‘콩밭지기’가 되었고 그들은 기술을 가르치기보다 참가자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고자 했다. 또한 그들은 누군가의 참여를 이끌어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주체적인 역할을 해내면서 진정한 ‘경험’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매개자의 역할을 하고자 했다. 서로 나이, 학벌, 출신 등을 밝히지 않기로 약속도 했다.
이렇게 콩밭학교를 마치니 소모임이 생겼고 골목으로 나가서 워크숍과 축제를 열어보기로 했다. 분명 좌충우돌했겠지만 무엇 하나 억지스럽지는 않았다. 그리고 올해 ‘서문 미식회’를 열었다고 한다. 혼자 요리하기 힘든, 밥 한 끼 나누고픈 1인 가구, 즉 자취생들이 근처 상인들과 함께 음식을 만들어보고 자취생들을 위한 레시피 책을 만드는 프로그램이었다. 축제에 모인 이들은 ‘상인과 손님’이라는 관계에서 ‘부모와 자식’과 같은 관계로 바뀌는 경험을 했다. 서민정 대표는 ‘경험’이라는 것이 어떠한 한 사람이 주체가 되는 과정이라고 언급하면서, 이러한 축제 프로그램을 통해 누군가와 함께 하는 과정 안에서 ‘나도 선생님’, ‘나도 기획자’라는 생각을 갖게되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한 공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력과 그들의 작은 꿈 하나하나에 귀 기울이는 ‘콩밭 학교’는 졸졸졸 마을 고샅을 지나는 작은 시냇물 같았다. 사실 이런 몇 줄로는 택도 없다. ‘내마음은 콩밭’ 블로그를 돌아다녀 보길 ‘강추’하고, 근처에 사는 분이 있다면 ‘내마음은 콩밭’ 카페(대구광역시 북구 대현동 249번지)에 찾아가보면 좋겠다.
“무엇을 함부로 하지 않아야해요.”
포럼에 오기 전에 노인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들을 모니터링했다는 고영직 평론가는 프로그램 진행 방식의 아쉬움을 표현하며 발제를 시작했다. 교육학자, 문화예술교육이 좋아하는 학자 ‘존 듀이’는 교육을 ‘행하며 배우는 것’이라고 했단다. 나아가 고영직 평론가는 문화예술교육을 ‘(고통) 당하고 피 흘리는 것’이라 말했다. 얼핏 그로테스크하지만 교육 참여자들이 바로 그 순간, 그 자리의 주인이 되어야한다는 뜻일 테다. 고통 없이 배울 수 있는 게 있을까. 어릴 때 엄마를 돕겠다고 계란후라이를 처음으로 부치다 기름에 손을 데었을 때의 통증이 떠올랐다. 고영직 평론가는 그 날 찾았던 노인복지관을 다시 떠올리며 인생주기는 이제 100년인데, 여전히 60세 이상의 사람들을 전형적인 노인으로만 뭉뚱그려 대상화하고 있다고 아쉬워했다.
이어, 잃어버리고 부족해야 무언가를 갈망하고 배우고 표현하게 된다고 했다. 또한 ‘우리는 왼쪽 가슴에 어린이를 두고 살아야 한다’며 어떤 하나의 ‘경험’으로 마음에서 불꽃놀이가 일어나길 바란다고도 했다. 또한, 자신이 참여했던 문학 캠프에서, 아이들이 제일 좋았다고 평했던 시간은 ‘종이와 펜을 들고 잔디에 누워 별을 보았던 때’라고 했단다. 문화예술교육은 이제 ‘무언가를 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가 아닌, ‘무언가를 함부로 하지 않으려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누가 그랬다, 상대방을 존중한다는 것은 그를 방해하지 않는 것이라고. 사람은 존중받을 때 성장한다. 문화예술교육이 상실과 결핍으로 허덕이는 누군가를 위로하고 그가 성장하길 바란다면, 정말이지 함부로 무언가를 해서는 안 된다. 나의 첫째 딸아이가 분명 싫다고 했지만 그 말을 귓등으로 듣고 국에 밥을 말아주었고, 아이는 식사를 거부했다. 남의 의견을 묻고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일이 얼마나 속 타는 일인가. 하지만 제도 교육 아닌 문화예술교육이라면 이렇게 애가 타고 속이 썩는 시간이 꼭 필요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는 ‘앎’을 뜻하는 세 가지 그리스어를 말해주었다. ‘머리로 아는 것, 몸을 관통해서 아는 것, 제대로 하는 것’으로 풀이되는데 이 순서는 무언가를 ‘알아가는 과정’과도 일치했다. ‘텔레비전에서 봤어’라는 식의 앎의 과정은 정말로 내가 아는 것이 아니라며, 그는 ‘앎’이 ‘삶’을 구원할 수 있기를 바랐다.
한 장의 사진으로 설명하는 창의예술학교 현장
이어 창의예술학교 네 곳 중 세 학교에서 사진 한 장으로 일 년의 과정을 설명했다. ‘북구문화의집’ 박우주 님이 소개한 <바퀴달린학교> 사진은 자투리 나무로 만든 작은 책걸상들이었다. 투박하게 생겼지만 테이블보까지 덮여있다. 아이들의 정성이었다. 아이들이 ‘장난감 공장’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전차를 만들던 중 짬을 내어 한 데 모여 그냥 만들었단다. 아이들 사이에 관계가 생겼고, 도구와 재료를 보는 눈이 생긴 것이다. 박우주 님은 덧붙여서, 아이들이 계속해서 사람들과 만나고 자연과 만나려는 순간 순간이 바로 ‘예술적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고 전했다.
다음으로 ‘문화약방’ 위명화 님은 <재미마중노리학교> 사진으로 일흔 다섯 살 신사 ‘나주군’(본인이 지은 별명이다, 아마 나주에서 오셨겠지)을 소개했다. 사진 속 그는 졸업식에서 수업후기 ‘힐링의 김냇과를 찾아서’를 낭독하고 있었다. (김냇과는 광주 대인시장에 있는 문화복합공간이다) 재미마중노리학교는 2년제 학교이며 ‘청춘반’과 ‘가족반’을 꾸리고 있다. 2년 과정을 마친 분들은 헤어지기 아쉬워 ‘예술동창회’라는 소모임을 꾸리고 있단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농촌의 일상 속에서, 메말라가는 정서를 불러일으키고 한 템포 쉬어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동구문화원’에서 아이들이 ‘폴리’라 불리는 광주 시내의 예술조형물을 취재하는 모습을 찍은 사진을 <오디세이예술학교> 이나라 님이 골라왔다. 동구의 문화자원을 아이들이 찾아다니고 기록하며 일 년을 보냈다고 한다. 또한, 이러한 마을 탐험 과정을 통해 아이들이 말한 소감을 언급하면서, ‘경험’이라는 것이 ‘힘들면서도 재미있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고 했다.

  • 북구문화의집 박우주
  • 문화약방 위명화
  • 동구문화원 이나라
문화예술교육이라는 간판으로 만난 이들, 그들에게 무엇이 남았을까. 그들이 한 것은 ‘체험’이었을까, ‘경험’이었을까. 연말에 단체들과 성과공유회를 할 때면 각자의 이야기만 들어도 가늠할 수 있다. “뜻대로 안 되어 무지하게 헤맸고 여전히 아쉽지만 기대하지 않았던 극히 작은 변화와 성과도 있었다, 다음엔 이렇게 해보면 좋겠고 내년 계획은 이렇다, 그런데 너무 힘들어서 안 하고도 싶다”고 한다면 이들은 “그뤠잇!”. 분명 이들은 참여자들의 실명까지 거론하며 신나서 여러 에피소드를 늘어놓을 것이다. 하지만 문화예술교육 보다는 ‘지원사업’에 방점을 찍은 단체의 이야기는 계획안과 많이 닮아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났는데 별일 없이 모든 것이 예상대로 흘러갔다면, 그건 ‘만남’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
“나를 예술가로 만든 것은 교육이 아니라 오타쿠적 경험이었다.”
정다운 작가는 포럼이라는 새침한 자리엔 당최 어울리지 않는 용모와 용어들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오타쿠’라고 소개했고 ‘오타쿠적 경험’이 자신을 예술가로 만들었다고 했다. 중학교 때 영어 시험지를 백지로 내서 비 오는 날 교실에서 ‘공개처형(?)’을 당했던 날, 생활기록부에 한 줄이라도 넣으려고 미술부 선생님의 아들 옆에 붙어있었던 때를 회상하며 말했다. “삶의 지혜는 교과서와 스승에겐 없었다”. 또한 ‘애니메이션-감상-코스프레/2차모방-재창작’ 이것의 무한반복이 오타쿠의 알고리즘이라고 소개하며, 본인은 메이드(가정부) 제복을 입은 소녀를 다양한 설정으로 그리고 있다고 했다. 그는 현실뿐만 아니라 판타지 또한 자신의 세계로 인정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 화가이자 ‘오타쿠’ 정다운 작가
  • <바퀴달린학교>에서 아이들과 만든 전차
나는 그를 몇 번 본 적이 있다. 무언가를 뚝딱뚝딱 만드는 자리엔 그가 있었다. 그리고 거의 말없이 작업만 하고 있었다. 선생이라기보다 아이들 중 한 명 같았다고 할까. 그런데 이 날도 “나는 열두 번째 학생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섞여 놀았다’는 뜻이다. 이번 <바퀴달린학교-장난감공장>에선 애니메이션에서 나오는 커다란 전차를 아이들과 만들었단다. ‘혼자서 할 수 없는 규모의 장난이라 아이들에겐 매력적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오타쿠, 예술, 놀이, 장난’. 그의 표현에 의하면 ‘밥 안 먹고도 할 짓’이었고 모두가 닮아 있었다. 어쩌면 정다운 작가의 ‘오타쿠적 경험’은 다시 말해,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집중해서 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교육은 만남입니다.”
세상엔 별의 별 교육이 있다. 인성, 창의, 시민, 인권까지도 모두 교육 앞에 붙는다. 가르칠 것은 왜 이리 넘치는가. 그렇다면 교육은 무엇인가. 박형주 센터장은 교육을 ‘만남’이라고 정의했다. 그리고 교육이란 말로 이뤄지기보다, 무언가 배우려는 사람이 어떤 이의 삶을 뒤에서 지그시 들여다볼 때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렇게 물었다. “당신은 학생들과 나누고 싶은 ‘절실한 삶’이 있습니까?”
물론 모든 만남이 교육은 아니다. 난 결혼 후 친정엄마를 다시 만나게, 즉 이해하게 되었다. 그녀가 날 어떻게 키웠고 살림했는지, 어떤 꿈을 꾸거나 버리고 살았는지 너무도 궁금했고 그렇게 나는 엄마를 ‘경자 씨’로 부르게 되었다. 난 엄마, 아내, 직장인이라는 직분을 동시에 얻고 너무도 혼란스러웠기에 ‘경자 씨’를 인생선배로서 소환할 수밖에 없었다. 엄마를 여자로 만나는 일은 새로운 경험이었고 나와 그녀의 관계는 새로워지는 중이다. 이제야 엄마가 선배이자 선생으로 보인다. 이게 지난 2014년 가을에 ‘한사람을 위한 문화예술교육-울엄마 편’ <경자 씨와 재봉틀> 프로그램을 꾸린 계기이기도 했다.
<경자씨와 재봉틀> 프로그램
〈경자씨와 재봉틀〉 프로그램은 2014년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노인 문화예술교육 시범사업의 일환으로 광주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가 기획, 진행한 50-60대 여성 대상 프로그램이다.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정의는 다양하나, 이 프로그램의 기획과 연구는 ‘문화예술교육을 통한 보다 나은 삶의 추구’라는 관점을 담고 있다. 동시에 보편적 인간의 생애주기를 전제로 문화예술교육의 향후 역할에 대한 모색이 담겨 있다.
박형주 센터장은 다음으로 옛날엔 ‘배운 양반은 다르네’라는 표현이 쓰였지만 지금은 우스갯소리로나 쓴다고 예를 들었다. 배운 대로 사는 이가 많지 않은 세상이니까. ‘앎이 삶으로 이어지도록 부단히 노력하는 일‘이 바로 ‘학습’이라 할 수 있다. 배우고 익히기 위해선 경험이 필요하지만, 경험이 곧 학습으로 이어지진 않는다고 했다. 며칠 혹은 몇 년이 걸려 그 때 그 경험의 의미를 깨달았을 때 학습이 가능하고 실패하고, 다시 시도하고, 깨닫는 과정은 필수다. 그러니 무언가를 배우려면 우연 등 계산되지 않은 것을 즐겁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다. 또한 문제를 해결하고 한계를 뛰어 넘어야만 능사가 아니며, 자신이 지닌 능력과 자원으로 최대치의 결과를 내보는 경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또한 경험의 질과 양이 문제가 아니라, 경험을 어떻게 재구성하느냐가 중요하다고도 했다. 이는 오타쿠의 알고리즘과도 일치한다.
또한 여러 조언이 이어졌다. “가르치려는 대상의 상태를 객관적으로 읽어야한다. 삶의 나이테가 있는 분들과 함께 하면 상상했던 것을 실제로 구현할 수도 있다. 부담스런 발표회를 꼭 할 필요 없고, 함께 경험한 것을 보여주면 된다. 보편적 확장을 위한 지원사업 말고, 결실을 위한 지원이 필요하다. 틀을 깬 사업구조를 실험하고 그게 어느 정도 성공한다면 오히려 그 모델을 따라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등등.
문화예술교육 행정에 참여했던 사람으로서 강렬히 기억한다. 문화예술교육이 그간 얼마나 숫자를 좋아했는지. 차시, 시수, 참여자 수, 강사 수, 만족도, 강사 점수, 예산 단가 등 1부터 100까지 빡빡하고 살벌했던 기준들을 기억한다. 여러 시절을 거치면서 문화예술교육 쪽 예산이 늘었고, 일자리 수나 만족도 등으로 성과를 어떻게든 드러내야했다. 또한 문화예술교육을 수익사업으로 보고 덤벼든 단체들이 늘어났고, 교육에 참여하는 이들에 대한 고민보다는 교육을 할 수 있는 이들의 재주만 드러나는 수업들도 늘어났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어느 날 무언가 이상해, 강사비가 제대로 지급되고 있는지 여쭙자 외려 ‘너 같은 계약직 목 날리는 건 일도 아니라던’ 어떤 예술단체 대표의 예술적인 한마디가 훅 하고 떠올랐다. 쓰디 쓴 기억들이 야구연습장의 공처럼 툭툭 튀어나왔다. 담당자로서 현장 한 번 찾아가는 것조차 버거울 정도로 서류와 숫자에 치이던 날들도, 어디 흠 잡을 데 없는지 의심을 곤두세우고 정산 서류에 코 박고 있던 겨울도 떠올랐다. 한 번도 맡지 않았던 ‘학교 예술강사 지원사업’에서 담당자가 힘들어하던 모습도, 예술강사들의 냉소와 냉담도 또렷이 기억한다. 전국에 있는 동종업계 노동자들과 일 년에 서너 번 만나 넋두리하다가 문화예술교육의 가치를 되새기며 숙취와 함께 헤어지던 날들도 찡하게 남아있다.
포럼, 이런 말이 붙는 자리는 여럽다(‘쑥쓰럽다’는 전라도 말). 그래도 잘 만났다. ‘체험에서 경험으로 넘어가자’는 이 자리의 주제는 문화예술교육에만 하는 말은 아닌 것 같다. ‘제대로 살아보자’는 선언인가 싶다. 맹맹하게 수박 겉만 핥지 말고, 손가락 다치고 온 사방 어질러지더라도 기언치 수박을 쪼개 그 달디 단 맛을 보자고 말이다. 뭐, 하나도 안 익었대도 별 수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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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아영_광주 청소년삶디자인센터 협력기획팀
abong@samdi.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