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미국어린이놀이터협회의 로비로 인해 일본 놀이터에 적용되기 시작한 4S(Slide, Swing, Seesaw, Sandbox)를 한국의 놀이터는 그대로 모방했다. 정작 미국이나 일본은 1960년대 중후반부터 4S를 넘어 보다 창조적이고 개성적인 놀이터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현재 한국의 학교와 공공 놀이터는 여전히 4S 시대에 멈춰져 있다. 규격화된 철제 미끄럼틀(Slide), 시소(Seesaw), 그네(Swing)와 모래밭(Sandbox)이 거의 모든 놀이터에 설치되어 있다. 대략 일본보다도 50년 이상 뒤처져 있는 셈이다. 산업 성장과 개발 주도 시대는 수많은 산과 언덕을 평지로 만들었다. 포클레인으로 긁어낸 부지에 똑같은 놀이터가 들어섰다. 자연 지형은 깎고 다듬어야 할 대상일 뿐 주어진 제약과 활용할 조건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개발주의 시대 리더들은 자연 지형이 그 자체로 가장 좋은 놀이터의 조건이자 배경이라는 점에 무지하거나 무감각했다.

산 크리스토발 언덕의 200주년 기념 어린이공원 전경. 농수로를 복개한 산책로가 구불구불 언덕 위로 이어져 있다.

2012년 산티아고에 세워진 칠레 독립 2백 주년 기념 어린이 공원(Bicentennial Children’ s Playground)은 달랐다. 주어진 지형을 십분 활용했다. 칠레의 주 수도 산티아고는 급격한 산업화 영향으로 성장하기 시작했지만 많은 문제점을 갖고 있었다. 도시에는 시민들이 안전하게 보행할 긴 산책로가 단 한 곳도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칠레는 도시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 특히 공공장소를 조성하는데 주력해왔다. 공원이 들어서기 전 산티아고 중심, 레코레타(Recoleta) 지역의 하천은 복개되어 고속도로가 차지하고 있었다. 겨우 남은 곳은 버려진 ‘산 크리스토발(San Cristobal Hill)’ 언덕과 경사면을 따라 조성되어 있던 오래된 농업 수로였다.
이제 농업 수로는 복개되어 언덕을 따라 오르는 10km 길이의 보행자 전용 산책로로 변신했다. 도로와 접한 산책로의 하부 310m 구간에는 수직 미로형 놀이 산책로(Path-as-play)가 담장을 대신하고 있다.

수직미로형 담장이 세워진 놀이산책로

쓸모없이 버려졌던 언덕의 급격한 경사면은 다단 폭포처럼 배치된 미끄럼틀이 장관을 이루며 압도적인 놀이 전경을 만들고 있다. 맨 위의 미끄럼틀까지 올라가 수많은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오고 싶다면 언덕의 한편에 있는 노상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갈 수 있다. 이처럼 산티아고의 2백 주년 기념 어린이 공원은 언덕, 좁고 긴 부지, 수로 등 지형을 이용해서 개성적 인상을 남기는 세계적 사례가 되었다.

  • 언덕 경사면에 조성된 미끄럼틀들(사진출처: Cristobal Palma)
  • 언덕에 설치된 노면 케이블카(사진출처: Lily)

이 놀이터에는 미끄럼틀 군집과 놀이 산책로 외에도 전망대 역할을 하는 나무 오두막, 공 모양의 석물 분수가 있다. 특히 이곳의 원형 그네는 그네를 타는 다른 방법을 제안한다.
원형의 구조물에 20개가 넘는 그네가 달려 있어 그네를 타는 아이들은 서로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다. 이곳의 원형 그네는 한국의 놀이터에서 흔히 보듯 옆으로 나란히 타야 하는 똑같은 그네와 사뭇 다른 놀이 경험을 제공한다.

  • 전망대 역할을 하는 나무오두막(사진출처: Gobierno)
  • 구체형 석물로 만들어진 분수(사진출처: Gobierno)

놀이시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곳엔 격렬한 놀이 후에 부모와 함께 아동 인형극을 볼 수 있는 원형극장과 그늘에서 쉴 수 있는 단풍나무숲, 커피 등 음료를 마실 수 있는 카페가 마련되어 있다.

  • 원형극장(사진출처: skyscrapercity)

지형을 활용한 좀 더 소박한 사례를 함께 소개해본다. 덴마크 스뫼움(Smørum) 지역의 발스모스콜엔(Balsmoseskolen) 학교 운동장 놀이터는 아주 작은 몇 개의 둔덕을 살려 만들어져 있다. 이 놀이터는 “자연은 본래 수평이 아니다. 세상살이도 반듯 반듯하지 않다. 굴곡이 있는 삶을 살아가려면 인위적인 수평을 거부해야 한다”고 학생들에게 말하는 듯하다. 이 놀이터는 울퉁불퉁한 지형때문에 더 재미있고 도전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이곳엔 장대, 원숭이 밧줄, 밧줄 다리, 터널, 짚라인과 독특한 정글 트랙이 설계되어 있다.

  • 덴마크 발스모스콜엔의 둔덕을 살린 놀이터(사진출처: ELVERD)

미래는 경험의 다양성에 기반을 둔 창의력이 요구되는 시대일 것이다. 그렇다면 어느 곳을 가나 뻔한 획일적 놀이터는 우리 사회의 문화적 적폐라 하면 지나친 말일까? 지역의 지형을 활용하여 고유한 놀이 전경과 인상, 색다른 놀이 경험을 제공하는 놀이터들이 한국 곳곳에 등장하기를 기대한다면 너무 이른 꿈일까? 나는 그런 놀이터를 꿈꾸는 시민들과 디자이너, 건축가, 조경가들을 고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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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원 _ 적정기술, 기술놀이교육 연구가
적정기술, 기술놀이 연구가.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 ‘생활기술과 놀이 멋짓 연구소’ 마루. 흙부대생활기술네트워크 매니저, (주)숲과도시 이사. 저서로 『이웃과 함께 짓는 흙부대집』(들녘, 2009), 『점화본능을 일깨우는 화덕의 귀환』(소나무, 2011), 『화목난로의 시대』(소나무, 2014), 『근질거리는 나의 손』(소나무, 2015), 『시골, 돈보다 기술』(소나무, 2017)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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