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씨는 그림이나 조각, 혹은 건축과는 다르다. 글씨는 뜻을 전하는 기호의 의미가 우선되며, 그것이면 충분하다고 생각되기 쉽다. 그러나, 여기, 살아 움직이는 글씨를 쓰는 사람이 있다. 서예가이자 캘리그래피 작가 영묵 강병인. 그의 글씨는 그림보다 인상적이며 조각보다 강하다. 그리고 그 자체로 굳건히 버티고 선 하나의 집합체다. 그래서 우리는 그에게 ‘글씨 쓰다’가 아닌, ‘글씨 짓다’는 동사를 부여하고 싶다.

 

추사를 만나다, 글씨에 미치다

 

경남 합천, “완전 산골, 촌이에요. 제 고향은.” 문화예술 명예교사 영묵 강병인 선생은 자신의 고향을 ‘촌’이라고 말했다. “매일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며 장난치고. 제가 호기심이 엄청 많거든요. 길섶의 풀꽃이나 돌멩이 하나도 다 신기하고, 왜 이렇게 생겼는지 궁금하고. 보이는 것 모두가 신기했습니다.” 장난꾸러기 소년 강병인은 그리기를 좋아했다. 손재주가 뛰어났으며 그림으로 칭찬도 많이 받았다. 그런 그를 서예의 세계로 이끈 것은 예쁜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이 굉장히 고우셨어요. 하하… 선생님께서 ‘너 참 그림을 잘 그리는구나. 글씨도 잘 쓰고. 서예반에 들어 볼래?’라고 하시기에 서예를 시작하게 됐죠.”

 

고요히 먹을 가는 시간도 좋았고 또박또박 글씨를 쓰는 순간도 즐거웠다. 중학교에 올라와선 스스로 ‘영묵(永墨)’이라는 호를 지었다. “영원히 묵과 함께하겠다는 뜻이죠. 친구들에게 글씨를 써서 선물할 때 낙관을 찍으려 호를 지었어요. 지우개로 낙관도장을 파서 작품 아래 찍어서 선물하곤 했습니다.” 글씨 쓰기의 즐거움에 담뿍 빠져 있던 그의 눈이 떠진 것은 추사 김정희 선생을 만나면서였다. “교과서에 수록된 김정희 선생의 글과 그림을 보면서 ‘쾅’하고 뭔가 깨지는 마음이 들었어요. 제가 그때까지 알고 있던 글씨란 정형미가 있는 어떤 것이었거든요. 그런데 추사 선생님의 글씨엔 형태를 탈피한 자유로움이 있었어요. 글씨가 살아 숨쉬는 것 같은 기세가 있었지요. ‘나도 언젠가 이런 글씨를 쓰고 싶다’는 갈망이 생겨났습니다. ‘나만의 글씨’가 무엇일까에 대해서는 항상 고민이 있었는데, 추사의 작품은 그것에 대한 해답이었습니다.” 그의 붓에 더욱 깊은 간절함이 담긴 것은 그때부터였다. “군대 가서도 쓰고, 술 마시고도 쓰고, 기분 좋아서 쓰고, 그리워도 쓰고…” 강병인 선생은 쓰고 또 썼다. 글씨에 스스로의 숨결을 불어 넣고 싶었다. 하여 붓 잡은 손을 놓을 수 없었다.

 

 

한글의 아름다움을 피워내고 싶어라

 

강병인 선생은 시각디자이너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때는 캘리그래피에 대한 개념이 없었어요. 서예는 하나의 예술 장르로 존재하는 것이었고, 그것이 디자인에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지요. 그런데 일본에 가 보니 좀 다르더군요. 상점마다, 혹은 브랜드마다 개성있는 손글씨로 간판, 메뉴, 패키지를 구성해 놓은 것을 볼 수 있었어요. 일본은 서예가 학교 필수과목이고 성인들도 중요한 문서를 쓸 땐 손글씨나 붓글씨로 씁니다. 그런 문화 덕분인지 생활 속에 자연스레 캘리그래피가 녹아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느낀 바가 컸지요.”

 

1990년대에서 2000년대 초반, 마침 시기적으로도 캘리그래피에 대한 대중의 미감이 생겨났다. “일본에서의 사례를 보고 느낀 점이 있어, 저도 디자인 작업에 제 글씨를 녹여 내기 시작했습니다. 대중에게도 ‘손맛 느껴지는 글씨’에 대해 인식이 높아지던 때였어요. 2002년 월드컵을 통해 힘찬 붓글씨 로고가 널리 알려졌잖아요. 사람들이 캘리그래피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된 계기가 됐지요.” 오늘날 강병인 선생의 작품은 우리 생활 곳곳에서 발견된다. 남다른 개성, 질박하면서도 품위 있는 멋을 전하는 데 손글씨는 참으로 적합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친숙한 ‘국민소주’의 라벨에도, 일상생활 속에서 무심히 지나쳤던 중구, 동대문구 등의 지역 로고에도, TV를 켜면 방영되는 인기 역사드라마, 가족드라마의 타이틀에도 강병인 선생의 캘리그래피가 숨쉬고 있다.

 

“제가 글씨를 쓰는 까닭, 왜 캘리그래피를 하느냐고 묻는 질문에 저는 ‘한글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고 싶어서’라고 답합니다. 디자이너로 활동하면서 ‘한글은 영문보다 디자인이 떨어진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디자인했을 때 영문이 더 그럴싸해 보이고 멋있다고들 생각하죠. 그런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거든요. 한글처럼 아름답고 과학적인 글자가 없습니다. 예컨대 ‘봄’이라는 글자를 보면요. 이 안에 ‘봄’의 철학과 의미가 고스란히 담겨 있어요. 한글의 자음과 모음이 모두 본래의 뜻을 형상화한 기호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저는 ‘봄’ 한 글자를 써도 피어나는 느낌, 대지에서 움트는 느낌을 전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만약 한글을 모르는 사람이 제가 쓴 ‘봄’자를 본다 해도 어떤 활기를 느끼고 새싹이 솟는 듯한 생명력을 감지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것이 제가 추구하는 것입니다.” 강병인 선생의 말처럼, 그의 글씨가 사람들에게 큰 울림을 주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푸른 숨을 내쉬며 사람들의 망막으로 힘차게 달려가 각인되는 글씨를 위하여, 아름다운 한글의 힘을 위하여, 선생은 매일 쓰고 또 쓰는 것이다.

 

‘계기’가 되고 싶은 한 사람

 

“어린 시절, 자연과 추사 선생님은 저를 일깨워 준 커다란 존재였습니다. 성인이 되어서는 ‘완당평전’ 읽기를 통해 일상 속에 침잠해 가던 제 자신의 꿈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볼 수 있었지요. 제 삶에 있어 이러한 충격과 계기가 없었다면 저는 평생토록 저의 진짜 목표를 모른 채 살았을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삶을 변화시킨 ‘결정적 계기’에 대해 말하는 강병인 선생. 그렇기에 선생은 명예교사 활동에 소명을 가지고 있다.

 

“문화예술 명예교사로 학생들을 만나는 일이 참 설레고 좋습니다. 아이들에게 손맛 나는 글씨의 아름다움을 알려 주고, 한글의 수려한 멋을 전할 수 있으니까 말이지요. 그리고 저와의 만남이 아이들에게 새로운 눈을 뜨게 하는 계기였으면 해요. 한글을 새롭게 볼 수 있는 계기가 되고, 한글 쓰기의 참 멋을 알게 되는 계기가 된다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명예교사 수업 제목을 ‘한글보다, 한글쓰다’로 지은 것입니다. 물론 제가 추사 선생님만큼 큰 감동을 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작으나마 뭔가를 전해줄 수 있다면 기쁘겠습니다.” 자신이 느꼈던 예술에의 감동, 그리고 그것이 가져다 준 목표의식과 사명감. 강병인 선생은 이것을 후학에게 전하는 것이 응당한 임무라고 생각한다. 일깨움을 통하여 빛이 나는 아이들의 숨은 재능, 하지만 평면적인 입시교육 속 매몰되어 가는 아이들의 창의성을 명예교사 활동을 통해 피워 내고 싶은 것이다.

 

평생 몰두할 수 있는 대상을 갖고 있어 행복한 한 사람, 영묵 강병인 문화예술 명예교사. 그는 명예교사 활동을 통해 예술이 주는 몰입의 기쁨을 보다 더 널리 알리고 함께 나누고자 한다. 그리고 계속하여 쓰고 또 쓰며 대중에게 한글의 아름다움을 새기는 손길을 늦추지 않을 것이다.

 


 

글_ 박세라 사진_ 정민영 작품제공_ 강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