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밤, 해가 지니 떠오르는 그림책

신정수 | 웹진 콘텐츠팀

“마음 속의 ‘한 문장’들이 쌓여서 삶의 ‘이야기’가 된다(약 : 마음 속의 ‘한 문장’)”는 긴 제목은 즉흥적으로 지은 것이지만 한 편으로는 오랫동안 제 속에 있던 감동적인 문장이기도 했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가슴을 울리는 ‘한 문장’을 발견한 적이 있나요? 저는 가끔 기억의 감퇴가 마음의 감동을 배신해서 흐릿해지고, 먼지 덮인 듯 희미해지더라도 빛이 바래지 않는 한 문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한 문장은 어느 때 꺼내보아도 생생한 울림이 여전하지요. 그런 마음 속의 한 문장들이 쌓여서 풍요로운 삶의 이야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씁니다.

시인과 여우(BASHO and the FOX)
팀 마이어스 글. 한성옥 그림. 김서정 옮김.
도서출판 보림.
올 해는 유독 봄이 길고 진하게 찾아온 것 같습니다. 벚꽃과 라일락이 함께 피어 어두운 밤길을 걷고 있어도 눈이 부시고, 목덜미를 스치는 향기에 발길을 멈추게 되지요? 이런 봄 밤에는 누구라도 시인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새도 식욕이 돋는지 모이를 쪼아먹는 소리가 ‘따각따각’ 들립니다. 사람들은 가벼워진 옷차림과 경쾌해진 발걸음으로 기타를 들고 목길에서 노래를 하기도 하고요.
이런 봄 밤의 한 가운데 있으면 ‘시인과 여우’라는 그림책의 한 컷, 한 컷이 떠오르곤 합니다.
배경은 늦여름, 버찌가 새빨갛게 농익은 계절이지만 성급히 달려간 마음이 이 그림들을 떠올리게 하는 것 같습니다. 달밤에 일본의 하이쿠 시인 마츠오 바쇼(松尾芭蕉, 1644-1694)와 버찌를 얼마나 먹었는지 하얀 주둥이가 빨갛게 물든 인간들보다 훨씬 뛰어난 시인이라고 자부하는 여우와 시를 나누는 이야기입니다. 인간 세계의 훌륭한 시 몇 편은 여우들끼리 즐기고 남은 것들을 인간이 자고 있을 때 귓가에 속삭여 준 것이라고 말하는 여우들이지요.

옛날 옛날 일본에 바쇼라는 위대한 시인이 후카가와의 산속에서
신선처럼 살고 있었습니다. 자기 먹을 것을 먹고, 자기 잘만큼 자고,
자기 사는대로 살면서, 자기 시를 썼지요.
(그림책 ‘시인과 여우’ 중에서)
‘자기’ 먹을 것에, ‘자기’ 잘만큼 자고, ‘자기’ 시를 쓰면서, 자기 삶을 살았던 바쇼의 삶은 여름 버찌의 달콤함만큼 부러움을 일으키지요. 하지만 ‘자기’ 시를 쓰며 자기 삶을 살았던 바쇼는 스스로 위대한 시인이라고 자부하는 여우들에게 버찌를 놓고 시 내기를 하게 되면서 타자를 감동시키는 ‘자기’ 세계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됩니다.
마츠오 바쇼는 일본의 존경받는 하이쿠 시인입니다. 일본의 하이쿠는 17음절의 짧은 시 안에 시인이 발을 딛고 있는 세계의 움직임과 감동을 담아내는 시입니다. 섬세한 감수성으로 자연이 내게 거는 말을 읽으며 정교하게 단어를 골라 17음절로 다듬어내는 작업입니다.
‘시인과 여우’라는 그림책은 버찌의 향기가 무르익은 늦여름에을 배경으로 시인의 세계와 타자의 세계가 교차되는 짤막한 이야기 속에 마츠오 바쇼의 시와 아름다운 삽화가 담겨있습니다. 이 그림책을 읽는 시간 동안은 시인이 보고 느겼던 세계 속에 들어갔다 나온 듯한 기분을 느낄 수 가 있습니다.

오래된 연못
개구리 뛰어든다
물소리 퐁당

이 시는 바쇼는 물론, 하이쿠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림책 속에서 여우는 “조금 낫군”이라며, “그 정도는 새끼 여우들도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 후로 어느 때보다도 열심히 시를 써보지만 어느 것 하나 마음에 들지 않게 되지요. 여우와의 내기의 마지막 기회에 터덜터덜 산길을 걸어가는 바쇼의 마음 속에 떠오르는 시 한수에도 ‘좋은 시는 아니지만 들려줄 만은 하겠지’라는 마음이 들게 됩니다. 위대한 시인이라고 여겼던 바쇼가 여우의 시험에 ‘자기’ 세계에 대한 의심이 생기는 대목이지요.

여름 달 위로
여우 꼬리 끝처럼
흰 산봉우리
라고 바쇼가 입을 떼는 순간, 여우들이 벌떡 일어서며 바쇼의 시를 찬탄하고 온 산의 버찌는 영원히 바쇼의 것이라고 합니다. ‘여우는 눈을 지긋이 감고 앉아, 잘 익은 버찌를 맛보듯 바쇼의 시의 낱말 하나하나를 맛보았’지요.(시인과 여우 중)

“왜 지난번 시들은 좋아하지 않으면서 이 시는 그렇게 좋아하는 건가? 이 시의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드는 거야?“ “그런 바보같은 질문이 어디 있어요?” 여우는 철벅철벅 강을 건너며 소리쳤습니다. “이 시에는 여우가 들어있잖아요!” (그림책 ‘시인과 여우’ 중)

‘자기’ 삶을 살며, ‘자기’ 시를 쓰던 바쇼가 여우의 세계와 조우하는 순간에 산 가득히 진동하는 버찌향은 많은 것들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건 타인의 감수성을 읽으며, 나의 세계를 확장해나가는 향기일 겁니다. 봄 밤, 해가 지고나면 조금 이르지만 버찌향을 맡아보세요. 바쇼의 산속 오두막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그 안에는 계절의 풍미와 함께 나의 예술과 문화는 타자와 공감할 수 있을 때 더 짙은 향기를 풍긴다는 이야기도 담겨 있습니다.

첫번 째 한문장 :내 속의 문장은 다른 사람의 세계와 교감할 때 더욱 짙은 향기를 뿜는다.

[그림책 ‘시인과 여우’의 글과 그림의 사용은 도서출판 보림에서 협조해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