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무지(friche) 프로젝트: 버려진 공간을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하다
 

유럽은 버려진 공간을 재단장하여 아틀리에나 전시, 공연장 등의 새로운 문화공간으로 활용한 역사가 40여 년에 이른다. 프랑스에서는 이러한 공간을 ‘황무지’라는 의미의 ‘프리쉬(friche)’로 통칭, 정책적으로 프리쉬 사업을 활성화시켜 왔다. 정부 주도의 문화 활성화 정책의 일환으로 시작된 이 거대 프로젝트는 ‘도시재생과 사회 통합, 일반인에게는 문화예술 향유의 기회 확대’라는 측면에서 적극적으로 확산되었다.

 

파리 시 북쪽, 19구의 생 마르탱 운하 근처에 위치한 ‘썽캬트르’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 곳은 40,000m2에 달하는 면적으로 1873년부터 1997년까지 매년 27,000대의 영구차가 거쳐갔던 장례식장이었다. 썽캬트르는 1997년에 폐쇄된 이후로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가, 2006년 3월부터 공사를 시작해 2008년 가을부터 새로운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했다. 폐쇄되었던 낡은 건물이 이제는 과거 역사에 대한 흔적을 보존하면서 창작과 생산, 교육을 중심으로 하는 다 영역의 예술공간으로 조성된 것이다.

 

2008년 개관 당시 썽캬트르는 예술의 확산보다는 작품 생산과 공연 등을 위한 창작 공간이 되는 것을 표방했다. 2년 가량의 시행착오를 거친 후, 2010년에 조세 마뉴엘 곤살베스(José-Manuel Gonçalvès)로 디렉터가 교체되며 썽캬트르는 새로운 운영 방식을 모색하였다. 수명을 다한 초콜릿 제조 공장을 문화센터로 만든 ‘페름므 뒤 뷔숑(La Ferme du busson)’의 전 책임자이기도 한 그는, 썽캬트르의 기념비적인 역사성과 창작을 우선시하는 예술적 야망은 지키되 운영 전략을 바꿔나간다.

 
 

 
 

그는 먼저 이곳이 지역 주민에게 열린 공간이 되기를 희망했기 때문에, 창구나 입구를 가로막는 것을 없애 자유로운 출입이 가능하도록 재정비했다. 가장 큰 변화라면 창작의 주체를 대중으로 돌렸다는 점이다. 엘리트 예술인들의 전유물이 되는 폐쇄적 창작공간에 그치는 것을 지양하고, 시민이 직접 주체가 되는 공간으로의 전환을 꾀해 문화민주주의의 이념을 보다 적극적으로 실천한 것이다.

 

또 파리의 중심부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이곳을 열린 공공의 장소로 만들기 위해, 많은 사람을 모이게 하는 데 주력했다. 매일 12시부터 19시까지 썽캬트르의 가장 큰 홀은 주민들과 학생, 힙합 댄서, 배우, 아티스트들의 연습 공간으로 개방되고 있다. 주민들은 배드민턴을 즐기거나 저글링과 같은 곡예, 발성 연습을 하는 등 다양한 목적으로 공간을 이용한다. 특히 1년 전부터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활동이 늘어나고 있다. 작품을 훼손하거나 타인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이러한 자발적 활동에 한계는 없다.

 

주민들의 피크닉 장소로 이용되기도 하는 대형 홀에서는 누구나 천으로 된 의자 위에서 편히 쉴 수 있다. 주말에는 카페와 레스토랑, 서점, 아틀리에에 방문하는 사람들로 더욱 북적인다. 토요일 아침에는 유기농 식품 매장이 인기이고, 주말마다 열리는 무료 기공 체조 교실도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썽캬트르의 전시회장은 ‘퓌튀르 엉 센느(Futur en Seine)’와 같은 대형 디지털 박람회가 열리고, 내부 홀은 키스 해링의 거대 설치미술전 같은 현대미술 전시까지도 자연스럽게 수용이 가능하다. 싱어송라이터인 매튜 셰디드(Matthieu Chedid)의 새 앨범이 이 곳에서 소개되는가 하면, 패션 디자이너 알렉산더 맥퀸(Alexander Mcqueen)의 2009년 봄 가을 컬렉션 쇼가 열리는 등 그 활용 범위가 무궁무진한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마탈리 크라세(Matali Crasset)가 디자인한 ‘어린이들의 집(La Maison des petits)’은 공립 놀이방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한다.

VideoLa Maison des Petits du Centquartre s’agrandit!

 

최대 30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이곳은 0세에서 5세까지의 아이와 부모에게 무료로 개방되어 썽캬트르를 찾은 주민의 자유로운 시간까지 보장한다. 매주 수요일 오후에는 6세부터 14세까지의 어린이를 대상으로 아틀리에 작가와 함께하는 예술교육이 이루어진다.

 
 

조형예술부터 문학, 패션 그리고 영화까지, 400여명의 예술가들을 위한 아틀리에
 
 

 
 

썽캬트르는 ‘예술적 창조의 공간’이라는 기본 정신을 지키면서 ‘예술가와 대중의 교류, 프로그램과 교육, 아이디어의 교류, 국제간의 교류’ 등 문화적 활동이 서로 오가며 섞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조형예술, 음악, 무용, 연극, 비디오, 패션, 디자인, 영화, 문학 등 모든 장르의 400명 가까운 예술가들이 이 곳의 아틀리에를 거쳐갔다. 아티스트들은 썽캬트르 18개의 작업실에 입주해서 장 단기 프로젝트로 작업과 전시발표를 진행한다.

 

아틀리에는 2주에 한번씩 시민에게 개방되는데, 작업실 탐방과 설명회는 물론 워크숍, 컨퍼런스, 영화 상영 등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예술가와 대중이 만날 기회를 갖는다. 또한 외국작가를 포섭하고 3개월씩 해외의 작가들과 작업실을 교환하여 사용하는 등 국제 교류 역할도 하게 된다.

 

또 이곳에서는 아마추어 예술가를 위한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 ‘르 쌍끄(Le Cinq)’도 진행된다. 아마추어 음악가, 배우, 요리사, 스타일리스트들을 위해 연습장소와 설비, 레슨과정 등을 시간당 2유로라는 저렴한 비용에 제공한다.

 
 

‘창조와 혁신’을 모토로 예술과 연구, 산업의 협업을 강조하는 인큐베이터 프로그램
 

2012년부터 9월부터 썽캬트르에서는 ‘창조와 혁신’을 모토로 예술과 연구, 산업의 협업을 강조하는 인큐베이터 프로그램1)을 시작하였다. 문화와 산업간 공동작업과 혁신이 예술의 경제적 기반을 위한 전략 개발의 한 축이라 보고, 예술 자체가 경제적 가치를 갖춰 산업과 시장에 겉돌지 않고 편입될 수 있도록 시스템을 마련하고 있다.

 

미술, 음악, 공연, 축제, 뉴 테크놀로지 등 모든 종류의 문화예술 프로젝트를 공모하고 선정하여 연구실이나 레지던시, 기업과의 교류와 협업 등을 통해 제작을 지원하고 있다. 이 프로젝트는 예술 창작에 대한 지원이 사회 혁신과 경제적 가치를 가진다는 것, 특히 테크놀로지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예술이 오늘날의 새로운 환경을 구축하고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하였다.

 

고객지원담당 책임자인 발레리는 썽캬트르의 역할에 대해, 한마디로 ‘지역 사람들에 대한 서비스 마인드’라고 밝힌다. 그녀는 미래의 인큐베이터 프로그램이 표방하는 예술, 연구, 산업의 협업을 강조한다. ‘썽캬트르’가 중개자가 되어 문화와 산업 간의 예술적 만남의 장소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썽캬트르에서는 연간 30개에서 35개의 다양한 프로그램이 이루어지고, 6개월에서 24개월 단위까지 다양한 중장기 프로젝트를 가지고 있다. 시설 관리 및 프로그램 운영을 위해 연간 1100만~1200만 유로의 예산이 소요되는데, 이 중 800만 유로가 시에서 지원되고 나머지는 30여 개의 기업 후원 및 자체 예산으로 충당한다. 체계적인 재원 조성이 뒷받침되고 다양한 예술 프로그램, 주민들의 자발적 활동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운영된다는 점이 썽캬트르의 성공 요인이다.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우연히 마주치면서 스스로 새로운 문화적 경험을 창출한다. 예술센터가 전시장이나 공연장, 창작 공간 같은 단순한 기능의 문화시설에 그치지 않고, 누구나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플랫폼 역할을 하는 것이다. ‘대중의 교류야말로 이 공간에 에너지를 제공한다’는 도시문화 전문가 프랑소와 고트레(François Gautret)의 말처럼, 사람들과 장르가 뒤섞이며 썽캬트르만의 독특한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다.

 


1)현재는 2000년 설립된 테크놀로지 인큐베이팅 센터인 ‘아고라노브(Agoranov)’와 공동으로 인큐베이터 프로그램을 실행하고 있다. 디자인과 건축, 공연 예술에서부터 음향 및 영상 기술, 로봇 관련 영역까지 아우른다. 관련 분야 기업들은 공간, 교육, 지원금을 지원받게 된다. 6개월의 인큐베이팅 기간을 거친 후, 평가에 따라 최대 3회까지 연장 가능하다. 아고라노브에서는 현재까지 200개 이상의 프로젝트가 가동되어, 170개의 기업과 1400명 이상의 고용을 창출해냈다.

 

ㅡ서동희 해외리포터(프랑스)
 

 
* 뉴스레터를 통해 예고해드렸던 ‘Createquity: 온라인 저술 펠로우십 7개 국가별 예술교육 정책 개관’은 6월 14일 게재될 예정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양해바랍니다.